[한라일보] 열아홉-김복희
친구가 수박을 사 왔나 보다
수박이 썰린다 수박 향기는 어둡다
여름을 불러 온다 죽은 수박이 죽어 간다
죽은 사람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뒷모습은 짧은 밤을 가르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다음 날 다음 다른 날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들은
무서운 연료가 된 것 같고 매일 떠 있겠다는 의지로
태양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다
불 꺼진 부엌 한가운데
타오르지 않으면 괴로운 불이 일렁인다
물속은 물을 잘 모른다
빛이 가라앉고 가라앉아 타오르고
수면에 비친 것이 썩어 가는 동안
친구가 돈을 놓고 갔다
손끝이 하얘지도록
돈이 좋았다

삽화=배수연
수박을 사 온 친구가 돈을 놓고 가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간에 시는 여름, 죽은 사람, 태양, 부엌, 불, 빛, 물 등 여러 대상을 순서 없이 불러낸다. 마치 주체가 나누어지고 "태양"처럼 분할된 사물들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다"는 식이다. 열아홉이다. 열아홉에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들은" 연료가 되어 전전긍긍하며 불타오른다. 호출된 대상들은 한결같이 어둡고, 죽어가고, 여전히 우리의 것이 되지 않고, 잘 모르고, 썩어 가고 있다. 우리는 "불 꺼진 부엌 한가운데 타오르지 않으면 괴로운 불"로서 일렁이고 있는 존재여서 "열아홉"은 마냥 불안하고 심지어 수면에 비치는 듯 잘 보이지도 않는다. 분리되어 있지만 독립적이지도 않다. 사실은 고립된 것들의 만남의 불발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래서 앓고 있다. 친구가 "수박을 사 왔나 보다"고 실제를 멀리 느낄 만큼. 돈을 놓고 간 것이 좋을 만큼. 어쩌면 처음 화자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털어놓은 "돈이 좋았다"는 말이야말로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청춘의 외침으로 읽을 수 있으려나. 결국 김복희의 시 「열아홉」은 청춘이 시를 찾아간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시가 흩어진 청춘을 찾아 나선 거라고 해야겠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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