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90)애월읍 소길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90)애월읍 소길리
강인한 개척정신 유전자 그대로 계승된 마을
  • 입력 : 2025. 06.13(금) 03: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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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포근한 정감이 느껴지는 마을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사는 곳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조상 대대로 거역할 수 없는 자연풍토 속에서 사람의 향기를 키워온 것이다. 마을 주변을 둘러싼 동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인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여기에 머물고 있다. 1978년 제주 최초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것은 아직도 삼무정신이 살아 숨쉬는 마을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옛 이름은 '쉐질'이다. 목장지대로 쉐(소:牛)를 몰아가고 몰아오는 질(길:路)이라고 하는 지명과 마을 이름이 합치된 형태였다고 한다. 18세기 후반 한자표기에 牛叱里(우질리), 牛路里(우로리)라고 되어 있는 것은 '쉐질마을'을 뜻과 소리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소길리(召吉里)라고 쓴다. 마을에 좋은 일만 불러들이라고.

노로오름 정상 부근에서 흘러내리듯 유수암리와 상가리 사이를 뻗어내려 오다가 장전리 용흥리와 맞닿은 지역에서 멈췄다. 마을 허리를 평화로가 동서로 지나면서 마을 남쪽과 북쪽을 구분하는 모양새다. 북쪽은 정주여건이 좋아 오래전부터 가옥과 농경지가 많고 남쪽으로 올라갈수록 마을공동목장과 오름, 조림지역이 형성돼 있다. 전체 면적 중 북쪽에 분지형태를 띤 곳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마을공동체의 요람이다. 주변 마을들 보다도 땅이 비옥해 상대적으로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500여 년 전에 지금의 속칭 좌랑못 인근 신산모루 근처에 여러 가호가 흩어져 살다가 세월이 흘러 현재 지역으로 취락이 형성된 것은 300여 년 전, 허씨, 송씨를 중심으로 여러 성씨들이 이주해 마을 규모가 커진 것이라고 한다. 탐라순력도(1702)에 처음으로 지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17세기 이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 중산간에 비옥한 농토와 목축에 적합한 터전을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다.

좌랑못에 얽힌 사연은 후세의 마을공동체적 가치관에 불문율처럼 자리 잡고 있다. 정6품 좌랑벼슬을 하던 자가 권세를 이용해 마을사람들을 괴롭히고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마을 주민들에게 깊은 원한을 샀다. 횡포를 부리던 좌랑이 죽자 주민들이 몰려가 그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를 파서 넓은 연못을 만들어버렸다는 사실. 사람들을 괴롭히면 천벌을 대신해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징벌한다는 생각. 좌랑못 사연을 반면교사로 삼고 이웃의 소중한 가치를 마을의 정신적 근원이 되게 했으니, 자연스럽게 강력한 결속력이 발생. 이러한 규범적 가치를 동력으로 마을 사업들도 활발하게 이뤄져 왔다.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강한 마을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또한 이러한 정신유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룩한 성과들을 보면 2008년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풋감마을'을 테마로 농어촌지역 특화사업 마을로 선정돼 가로수와 운동장 주변에 감나무를 심었다. 다음해 2009년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한국농어촌공사 선정 제주시 녹고뫼권역(소길, 장전, 유수암)사업이 그 내용이다. 2011년에는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돼 체험프로그램을 통한 마을발전 방향이 마련되고 농어촌체험 휴양마을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 성과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목적 마을운동장 조성사업이다.

임윤석 이장에게 소길리가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한 단어로 대답했다. "승부근성".

조상 대대로 경작지를 개척하며 살아온 역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극복의지와 자존심 경쟁으로 점철된 결과, 지기 싫어하는 근성이 마을공동체의 풍토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 것. 어떤 마을 사업을 펼치더라도 그러한 마인드가 실천적 자양분이 된다고 강조했다. 안타까운 것은 새로운 사업 못지않게 진행되는 사업들에 대한 행정의 지속적인 관심과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운영예산을 만들어줘야 함에도 시작만 하고 과정과 결과는 마을에 떠밀어버리고 마는 현실에 분노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존된 마을공동수도의 추억
<수채화 79㎝×35㎝>


새로운 변화에 대한 열망의 대척점에 그 무게에 상응하는 보존의 가치를 올려놓아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마을사람들의 심성을 그렸다. 어떤 사명감에 가까운 소길(召吉)의 소명(召命)이라는 느낌이 밀려온다.

정물화 기법을 동원해 주제를 중심으로 주변 배경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수돗가이기에 물이 주는 시원한 느낌이 하늘로 솟아오르도록 회화적 입장에서 표현하게 되는 것은 저 실용적 구조물이 기능을 발휘하던 시절의 청량감을 복원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로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물구덕을 지고 와서 수돗물을 받고 집으로 향하던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와 다정한 이야기들을 붓 터치로 끄집어 낼 수 있으리라는 황당한 상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주변은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돼 있으나 길을 새로 내면서도 소박하게 담을 쌓아서 마을문화재 격인 이 공동수도는 후손에게까지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더욱 아름답게 다가와 경건한 마음으로 그린 것이다.

지난날들의 삶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저급하고 경박한 현상들에 대해 호된 꾸지람을 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이 마을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신적 자부심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오롯이 보여주는 장면이기에 그리는 과정동안 감동이 수돗물 쏟아지듯 쏟아졌다. 이러한 형태의 공도수도가 대부분의 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형태를 귀감으로 다시 복원이라고 권하고 싶은 엉뚱한 제안과 함께.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저 시절이 가지는 의미 또한 마을마다 간직한 소중한 역사이기에.





봉마을 풍경이 상징하는 것
<수채화 79㎝×35㎝>


고전적 분위기를 위해 수묵담채화 요소를 차용해 먹 대신 연필을 가지고 조상들이 표현하던 채색의 묘미를 살렸다. 원근법이 적용되기는 했지만 산수화가 보유한 다시점 감각이 가로가 긴 화면비례속에 녹아들게 하는 강점이 있어 저 눈물겨운 노동의 생성물들을 그리게 된 것이다.

마을 중장년층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듣게 되는 마을의 역사는 이렇다. "돌빌레(암반) 하고 평생 싸우며 살다 간 사람들의 땅" 작은 봉우리만큼 솟은 언덕마루를 개간해 농경지로 만드는 과정을 그리려 한 것이다. 그 피땀 어린 시간성을 풍경화라는 이름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저 계단식 밭을 만들기 위해 화산섬 특유의 현무암들을 얼마나 깨고 부숴서 나르는 작업을 했을까? 토목전문가와 역사학자들이 노동량 조사를 품샘으로 풀어 항목별 일위대가표를 만들어서 조상들의 집념 강도를 측정해보고 싶었다. 이 마을의 대부분 농경지들이 설촌 후 500년 이런 개척의 역사라는 사실을 이 풍경화를 통해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문화재라고 하는 것이 관아 건물이나 문헌의 기록에 나오는 시설물들 정도로 세뇌 아닌 세뇌를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노동의 역사물은 과연 그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그림을 그리는 내내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냥 평범한 계단식 밭으로 보일지 모르나 후손들을 위해 한 뼘의 땅이라도 개척해 남기고자 했던 조상들의 아름다운 심성을 표현한다. 소길리 사람들의 강인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사무치도록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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