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와 문학] (25)문영종 시 '늙은 배의 꿈'

[제주바다와 문학] (25)문영종 시 '늙은 배의 꿈'
"가슴 속에 닻 내려 한 점 기억으로"
  • 입력 : 2019. 10.18(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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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지는 포구에 쉬고 있는 어선들. 문영종 시인이 등단 32년 만에 내놓은 시집 '물의 법문'에는 직접적 바다 체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시편들이 흩어져있다.

외항선 타고 선상생활 15년
직접적 바다 체험 시로 직조
"상처도 아픔도 물이 되어…"

바다를 읊은 시인들이 많지만, 대개 바라보는 대상이거나 현실 너머 상상의 발현과 닿아있다. 그는 다르다. 배에서 기계를 다루며 바다를 직접적으로 체험했던 나날을 시로 품었다. 1978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고 데뷔 32년 만에 첫 시집 '물의 법문'(2010)을 냈던 제주 문영종(1955~ ) 시인이다.

그는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하고 15년 동안 외항선을 탔다. 시인으로 발디뎠던 해를 헤아려보니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선상생활을 막 시작했거나 그 직전이었던 것 같다. 바다가 그의 시를 낳았을지 모른다.

시집은 4개의 장으로 짜여졌는데 바다와 바다가 아닌 것에 대한 노래로 나누어도 될 듯 싶다. '나의 잠속의 바다는'을 시작으로 눈뜨면 망망대해 바다 밖에 보이지 않았을 어느 시절이 흩어져있다. 바다를 닮아가듯, 바다에 닳아지듯 그에 대한 심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나를 끌고 다닌 바다여/ 그 숱한 기억들 기억 속에 묻혀/ 너무 오래 출렁거렸구나 이제는/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그대/ 가슴 속에 닻 내려/ 한 점 기억으로 떠 있게 해 다오'('늙은 배의 꿈' 중에서)

'물 끝에 수장해' 달라는 '늙은 배'는 지금은 바다를 떠나온 시인의 상황이면서 나이든 현실을 빗대는 말이다. '싱싱한 하루 하루'는 과거가 되었고 그래서 '기억'이란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어느덧 밤바다 캄캄한 현실에 놓인 시인은 '자그만 물너울에도 무력하게/ 뒤뚱거리는 나'('바다 떠돌이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는 낭만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치열한 싸움터다. 뱃일을 하는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보자.

'바다는 가까이서/ 아냐, 멀리서 바라보기야/ 쇠냄새 나는 배에선 혀가 말라, 언제나/ 먼 공간을 꿈꾸는 바다지/ 몸 속의 물이 출렁거려/ 물소리가 닫힐 적마다/ 배가 머리를 숙이고/ 빛 속에서 만나 물무늬로 모여드는 기억'('수부수첩(水夫手帖)' 중에서)

험한 바다는 또 다른 생의 교과서다. '둥둥 떠 바다에/ 온 몸 풀어 물결에/ 온 바다 떠돌아다니며/ 거센 물결에 부딪쳐 바스러지며/ 바닷살과 같아지며/ 물빛에 취해 온 몸/ 상처도 아픔도/ 물이 되는 사랑'('해파리를 위하여' 전문)을 배웠다.

등단작인 '물빛아이'에서 바짓가랑이로 물구나무 서는 바다를 보고 있었던 아이의 모습은 더 이상 없지만 끝간 데 없는 그 존재감은 어른이 된 그 시적 화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밀려오는 산 같은 파도에 배는 번번이 비명을 지르지만 물결이 꿈틀대는 한 피할 수 없다. 생사를 가르며 건너온 물길 쪽 하늘은 때가 되면 맑아진다. 다시 세찬 물살이 닥쳐도 그것들은 언젠가 뒤로 물러날 거라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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