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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자존 한라산을 말하다
[제주의 자존, 한라산을 말하다](10)제2부 한라산의 인문학-③한라산 유산기로 살피는 옛 등산로
한라산 옛길에 비치는 제주인의 삶, 이야기가 되다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입력 : 2016. 08.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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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한라산. 옛 사람들이 남긴 한라산 유산기록을 활용해 옛길을 찾는 것은 특정 탐방로 집중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고 한라산 대체 탐방로를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경민기자

5·16도로 등 한라산 넘는 큰길 생겨나면서 옛길 흔적 흐릿
조선시대 유산기로 대정현 경유 등 4개 등산로 추정 가능
탐방로 집중 막을 대체 등산로 가능성… 생활상도 엿보여

"맑고 밝으며 깨끗하여 터럭 하나나 티끌기가 미치지 않아, 자취를 감춘 선인들의 씨나 있음직하고, 사방을 에워싼 산봉우리들이 높고 낮음이 다 가지런하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이다."

조선 고종 때 문신인 최익현(1833~1906)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한라산 백록담을 마주한 뒤 이렇게 썼다. 그가 남긴 '유한라산기'에는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여겨진 한라산, 그곳을 동경한 옛 사람들의 걸음이 읽힌다.

옛 선인들의 유람 기록은 저절로 한라산의 옛길을 좇게 한다. 유산기를 따라 그 길을 되짚다보면 최익현의 그것처럼 한라산을 바라보던 과거의 시선과 맞닥뜨린다. 그 속에 설핏 비치는 제주 사람들의 삶은 오늘날 한라산의 또 다른 이야기로 남고 있다.

한라산의 옛길은 지금과 다르게 펼쳐진다. 5·16도로, 1100도로와 같이 한라산을 넘는 큰 길이 나면서 그곳을 오르내리던 옛길은 흐릿해졌다. 그러나 선인들의 유산기록은 하나의 단서로 남아 그 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쓰인 유산기에는 한라산을 오르게 된 동기와 여정, 자연경관 인식 등이 그대로 남았다.

조선후기 문인화가 윤제홍이 그린 지두화 '한라산도'. 윤제홍은 이 안에 한라산을 오른 여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고윤정 연구원이 2013년 8월 펴낸 석사 논문 '조선시대 한라산 유산기와 등람 연구'를 보면 한라산의 옛 등산로는 크게 4개로 추정된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작성된 한라산 유산기 13편과 문헌 자료 등을 분석한 것이다. 유산기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쓰였으며, 조선시대 관리나 유배인은 물론 유람객 신분이었던 임제, 제주 문인 김희정의 것이 포함됐다.

"한라산은 대정현을 경유해 험한 산길과 나무 사이를 따라서 오르면 꼭대기에 닿을 수 있다." 제주 목사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의 한 대목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정현 지경에서 한라산으로 향하는 서쪽 등산로가 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시대 유산기 13편 중 7편이 서쪽 등산로를 통해 한라산을 오른 여정을 담고 있다.

한라산의 서쪽 옛 등산로는 제주목 서문에서 출발해 무수천, 광령2리를 거쳐 영실 존자암(대정현 지경 진입), 칠성대와 좌선암, 백록담 남벽, 백록담 분화구를 연결하는 코스로 추정된다. 현재의 영실 등산로와 차이가 있지만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70년 이전에 사용됐던 영실의 옛 등산로와 흡사한 경로를 보인다.

조선 고종 때 문신인 최익현이 남긴 '유한라산기'. 최익현은 1875년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자 제주 선비 이기온에게 길 안내를 부탁해 동행자 10여명과 한라산에 올랐다.

조선 후기 문신인 조관빈(1691~1757) 등이 이 길을 따라 백록담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라산 정상에 닿기까지 영실기암, 오백나한 등 빼어난 경관이 펼쳐지는 곳이어서 한라산에 오른 감흥을 더했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조관빈은 이 길로 백록담을 오른 뒤 '유한라산기'에 이 같이 적었다. "별안간 어떤 흰 사슴이 백록담 가를 따라서 지나갔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로다. 그때부터 일기가 아주 맑았다. 바다 빛은 아득히 트여 하늘과 바다가 서로 포용하는 듯해서 드넓은 물가의 언덕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한라산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한라산 북쪽 등산로도 서쪽 못지않게 발길이 잦았다. 나머지 유산기 6편 중 5편이 북쪽에서의 여정을 담았다. 북쪽 등산로는 대체로 제주목 남문에서 출발해 제주시 한천과 탐라계곡, 백록담을 연결하는 구간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제주 목사를 지낸 이형상(1653~1733) 등이 이 길로 한라산을 올랐다. 이형상의 경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바라다 보이는 북쪽 바다의 섬을 '남환박물'에 나열하기도 했다. 남환박물은 이형상이 저술한 제주도 인문지리지다.

이외에도 조천에 살던 제주 문인 김희정이 오른 것으로 추정되는 한라산 동쪽 등산로(절물오름에서 교래리, 통궤, 백록담 남벽, 백록담)와 임제의 하산길로 추정할 수 있는 남쪽 등산로(정의현에서 출발해 의귀리, 효돈천, 두타사, 백록담 남벽, 한라산 정상)도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 연구원은 "한라산 서쪽과 북쪽 등산로가 주로 이용됐지만 유산기를 분석하면 동쪽, 남쪽 등산로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한라산 옛길에 대한 확실한 루트 규명까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잊힌 옛길을 찾는 것은 한라산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한 해 100만명이 넘는 탐방객이 특정 탐방로에 집중되며 발생하는 문제를 푸는 데에도 옛길이 실마리를 제공할 거라는 의견이 나온다. 고 연구원은 "한라산 옛 등산로는 최대한 쉽고, 익숙하고, 물이 나오는 곳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며 "유산기록을 활용해 옛길을 찾는 것은 한라산 대체 탐방로를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라산 옛길에는 제주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옛길을 되짚는 것은 한라산을 알리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라산 유산기록은 대부분 외지인에 의해 쓰였지만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은 제주 사람이었다. 자연스레 한라산을 생활 터전으로 삼은 제주인의 얘기로 관심이 옮겨갈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유산기를 남긴 인물들은 현지 사정이 밝은 제주 출신 유생이나 사찰승려 등과 함께 한라산을 올랐다. 험한 길을 지날 때는 사냥이나 약초를 캐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산척'(山尺)을 앞세우기도 했다. 제주 목사 이형상은 남환박물에 "산척이 와서 말하기를 산 속에 눈이 얼마쯤 녹아서 사람이나 말이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유산기에 남은 한라산신제와 기우제, 칠성대의 존재 등은 한라산 안에서의 제주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잊힌 옛길이 가치를 지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거다.

특별취재팀= 강시영 선임기자·강경민·김지은·김희동천·채해원·강경태·강동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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