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참으로 독특한 마을 구조다. 곶자왈과 밭으로 빚어진 마을. 군데군데 농업용수로 쓰일 것 같은 큰 연못들이 있어서 풍성한 느낌을 준다. 옹기를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흙을 파내고 또 파내다 보니 물이 거기에 고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절정기에 마을 곳곳에 30기에 가까운 가마가 있어서 제주섬 옹기의 많은 부분이 이 마을에서 생산됐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기에 지명들 속에도 도요지 명칭이 수두룩하다. 앞동산 도요지, 종가샘이도요지, 큰밭논도요지, 서녁물앞도요지, 개미굴도요지, 간데기굴, 기와굴토, 웃보기와굴, 종개샘이기와굴 등. 조상들이 항아리를 만들다 보니 연못항아리까지 만들게 됐나 보다. 인위적인 물 자원 못지않게 16만평에 달하는 곶자왈이 품고 있는 자연의 신선함은 신평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웃날외' 또는 '웃날래'라고 부르던 마을이었다. 옹기나 기와를 굽거나 숯막을 지어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마을. 대규모 마을로 번창하게 된 것은 조선 말엽이다. 역사 기록에는 철종13년(1862) 보성리 서쪽 새롭게 약 20가구가 이주해 촌락을 형성하니 그것이 지금의 신평리 상동 지역이다. 그 후에 고종 원년(1864) 보성리 일부와 일과리 일부를 분리 통합해 신평리라고 부르게 됐다. 지세가 평지가 대부분이라는 뜻에서 신평리(新坪里)다.

김정준 신평리 이장
4·3 이전까지 인구가 300가호에 달했던 대촌이었으나 소개령으로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 살다가 거기에 터를 잡고 살아버린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돌아와서 불타버린 마을을 다시 재건하고 어렵게 다시 일어선 사람들이 지금 마을 주민들이다. 4·3 당시에 무장대와 군경 사이에 충돌이 예상될 수 있는 환경이라 마을이 불타는 비극을 겪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 아픈 역사를 품은 곶자왈이 지금은 부가가치 높은 생태자원으로 평가받게 되면서 마을공동체의 미래지향적 발전 방향을 열어가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마을 슬로건으로 내건 '늘 푸른 삶의 터전'이 상징하고 추구하는 것은 삶의 질과 농외소득의 결합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주민 자발성은 수많은 마을공동체 사업들을 통해 이미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소유인 46만평 곶자왈 중에 14만평 정도를 제주곶자왈도립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적극적으로 곶자왈 활용에 열정을 보인 결과 마을에서 수탁을 받아 관리를 하고 있다. 도립공원부설 '곶자왈 생태체험학교'를 운영하는 마을. 주민들의 환경보존 의지를 행정기관을 비롯한 외부에서 주목하고 인정한 결과다.
10년 전부터 이 곶자왈 생태사업과 관련해 주민들이 가진 기대와 포부는 대단했다. 이러한 희망찬 기대에 제주특별자치도의 행정적 노력은 곶자왈도립공원이라고 하는 명칭과 위상에 맞는 지원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획기적인 발전 전략이 나와야 할 것이다. 10년 가까이 신평리 주민들이 곶자왈도립공원이라고 하는 공익성에 기여한 공로에 걸맞은 구체적인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김정준 이장에게 신평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명료하게 한 단어로 대답했다. "일 욕심"이라고. 조상 대대로 너른 농토에 농사도 지으면서 옹기를 만드는 가마를 운영하면서 겸업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유했던 전통은 하나의 문화요, 기질로 자리 잡게 됐다는 것이다. 요즘 용어로 투잡(two jobs)은 기본이었던 상황에서 '부지런'이란 근면성. 그러한 전통이 마을 발전에 긍정적 마인드로 작용하고 있기에 진취적 해결방안을 찾아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천력으로 검증받고 있는 것이다.
신평리가 보유하고 있는 이러한 기질 속마을 주변 여건이 거대한 희망의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한다. 도립곶자왈공원이 제주의 중요한 관광명소로 거듭날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적 상황이 마련된다면 그 사업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역량과 자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마을이다. <시각예술가>
돌로 세운 열녀문<수채화 79㎝×35㎝>
명칭은 열녀오씨지문(烈女吳氏之門)이다. 혼인하는 날 신랑이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게 된다. 그러자 오 씨는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을 따라 죽으려 했으나 부모님이 타일러 뜻을 굽혔다. 시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 또한 남편에 대한 도리라 여겼기에 이를 평생 실천했다. 이러한 사연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광무4년(1900) 하사미(下賜米)까지 내려졌다고 한다. 자손들이 그 효행을 후세에 알리고자 1941년 신평리 137-1번지에 열녀문을 건립했다.
보통의 열녀문은 솟을대문 스타일이거나 홍살문인데 제주돌로 만들었다. 너무도 독창적인 관점으로 향토성 넘치는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다. 건립 당시 시대적 여건으로 중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큰 돌을 다듬어서 문(門)의 약자를 형상화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붓글씨 획의 흐름을 돌로 표현한 것이다. 두 개의 기둥과 상인방의 비례가 참으로 절묘하다. 품격과 권위가 넘치는 단순미가 이 농촌마을에 보물처럼 숨어 있는 것이다.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고, 후세에 두고두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돌조형물로 판단하기에 엄숙한 마음으로 그렸다. 고전적 느낌을 살리기 위해 동양화풍의 테두리 필선을 투입했고 문과 비석에는 존귀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판화적 요소를 가미했다. 풍경화라기보다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신평리가 보유하고 있는 이 놀라운 문화유산을 그린다는 것은 문을 세운 자손들의 마음을 그린 것이라 여기면서.
땅과 하늘, 하늘과 땅<수채화 79㎝×35㎝>
흙을 그리려 했다. 너른 땅을 그리려 하니 하늘이라는 공간에게 더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화면이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가로로 길게 뻗은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7할의 하늘이 배치돼야 하는 아이러니가 이런 파격적인 구도를 생성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신평리의 하늘은 땅의 덕으로 더욱 크고 높다. 상보적인 마인드로 서로를 존중하는 곳. 하늘과 땅 사이에 끼어있는 멀리 산방산이 신비감을 드러내는 것은 연결고리 정도의 의미. 그 메시지를 그림이라는 영역에서 표현했다.
신평리의 坪을 파자하면 '土 + 平'이다. 평평한 땅. 섬 제주에서 평야의 느낌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에 수많은 특징적 요소 중에서 대표 이미지로 너른 밭과 뒤따라서 펼쳐지는 파노라마 요소들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의 흙 색깔은 어딘가 모르게 화산섬이 보유한 화산회토와 다르다. 그 색을 수채화 물감으로 얻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치열한 제작과정에서 절감했다. 옹기마을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저 밭 흙을 어느 정도 걷어내면 옹기를 만들 수 있는 점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욕심이 생긴다. 멀리 도시화된 지역의 모습이 아주 작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서 대자연의 부분집합 정도로 해석된다. 어딘가 모르는 변화의 조짐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땅이 먼저 감지하고 있는 상황을 암시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뉘우치게 된 사실, 땅은 가장 낮으나 하늘만큼 위대하다. 신평리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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