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30] 3부 오름-(89)사려니와 넙거리, 비교되는 두 오름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30] 3부 오름-(89)사려니와 넙거리, 비교되는 두 오름
'사려니'와 '넙거리'는 모양이 대조적, 좁고 넓은 오름
  • 입력 : 2025. 06.10(화) 03:00  수정 : 2025. 06. 10(화) 12:57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사려니’는 ‘사랭이’에서 온 지명


[한라일보]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산2-1번지 일대다. 표고 523m, 자체높이 98m다. 동쪽 봉우리가 정상이며, 북서~북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고, 북동쪽으로 깊게 팬 반달 모양의 말굽형 화구를 지녔다.

이승악에서 바라본 사려니(왼쪽)와 넙거리(오른쪽). 김찬수

이 오름을 지역에서는 사려니 외에도 사랭이(사렝이), 사랭이오름, 사련악(四連岳), 서연(栖燕), 사련악(似蓮岳) 등으로 부른다. 1709년 탐라지도 등에 사련악(四連岳), 제주삼읍전도에 사류악(四流岳), 제주군읍지에 사련악(思連岳) 등으로 표기하였다. 네이버지도에 사려니오름, 카카오맵에 사려니로 표기했다. 지금까지 검색되는 이 오름의 지명은 사랭이(사렝이), 사랭이, 사려니, 사련악(四連岳), 사련악(似蓮岳), 사류악(四流岳), 서연(栖燕) 등으로 모두 7개다. 한자 지명 사련악(四連岳)은 '넉 사(四)'와 '잇닿을 연(連)'자의 결합이다. 한자 뜻으로만 봐서는 이 오름의 어떤 특징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사련악(似蓮岳)은 '닮을 사(似)'와 '연꽃 연(蓮)', 사류악(四流岳)은 '넉 사(四)'와 '흐를 류(流)', 서연(栖燕)은 '깃들일 서(栖)'와 '제비 연(燕)'자의 결합이다. 이 지명들 역시 글자의 뜻으로는 도무지 무슨 특징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모두 '사랭이'에 가까운 음을 가진 글자로서 음가자 방식의 차용임을 알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사랭이(사렝이), 사랭이, 사려니 중 어느 게 원 지명에 가까운가이다. 그리고 이 지명이 무얼 지시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이들은 모두 '사려니'의 변음이라고 풀이한 책이 있다. 그 책에는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라는 뜻을 가진 '사리다' 또는 '사리다'에 대응하는 제주어 '사리-'의 변음에 명사형 접사 '-이'가 덧붙은 것이라 했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언어의 유사성에 기댄 해석이다. '사려니'란 사실 위 한자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한자 뜻과 관계없이 사랭이를 나타내려고 한자를 동원하여 기록한 것일 뿐이다. 이걸 이제 와 한자음이 본디 이름처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사랭이', 좁고 긴 오름


우선 이 오름은 윗부분이 좁은 게 특징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등성이는 좁고 긴 형태다. '길다'라는 표현은 어떤 기준보다 '길다'는 뜻이라기보다 일반적으로 좁으면 '길다'는 표현도 따라오게 마련이다.

사려니에서 바라본 넙거리. 김찬수

정상부는 너무 좁아서 몇 사람이 같이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지금은 목재로 데크 시설을 하여 좀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좁다. 이 목재 데크 아래는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스패터(spatter)라는 암석이 삐죽삐죽 솟아 있다.

화산활동 시 강력한 가스가 녹은 용암을 분출시켜 이전에 분출된 용암 위로 쌓이면서 스패터 콘을 만든다. 이런 유형의 화산은 평평하지 않아 정상부 공간이 좁기 마련이다.

'솔다'라는 말이 있다. 사용 빈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공간이나 폭이 좁다'라는 뜻이다. 남북 언어에서 공통이다. 제주어에는 '사랑하다'는 '길쭉하다'는 뜻으로 쓴다. 비교적 흔히 사용한다.

'사랑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여럿이 길쭉길쭉하게 놓였거나 누워 있는 꼴'을 일컫는다. '소람하다'라는 말도 있다.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갸름하다'는 뜻이다.

이 말들은 '솔다'에서 분화한 말이다. '솔다'의 어근 '솔'을 개음절로 발음하면 '사라'가 된다. 실생활에서 "여동생이 한 달을 앓더니 얼굴이 사롬해졌저"라든가, "떡을 사랑사랑 썰라"라고 할 수 있다. '얼굴이 홀쭉해졌다', '떡을 좁고 길쭉하게 썰어라'라는 뜻으로 쓰는 것이다.

사려니오름을 현지에서는 '사려니'라고 채록됐다지만 실제로는 '사랭이(사렝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리다'에서 온 말이라기보다 '솔다'에서 온 말임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좁고 긴 오름'이라는 뜻이다.



'넙거리', 넓고 급한 오름


이렇게 해독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웃하는 '넙거리(오름)'라는 지명으로 더욱 뚜렷해진다. 이 오름은 1709년 탐라지도에 광거리(廣巨里), 1899년 제주군읍지에 광거이(廣巨伊), 1965년 제주도에 넙거리오름, 광가악(廣街岳)으로 표기했다.

한남리 마을지에는 '넓게오름'으로 표기하면서 산 위가 넓적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지형이 넓은 바다 게의 형상이라는 데서 온 이름이라는 설을 소개했다.

한자 지명 광거리(廣巨里)는 '넓을 광(廣)+거리(巨里)', 광거이(廣巨伊)는 '넓을 광(廣)+거이(巨伊)', 광가악(廣街岳)은 '넓을 광(廣)+거리 가(街)'의 구조다. '광(廣)'은 모두 넙거리의 '넙'을 나타내고자 빌려온 한자로서 훈독자 차자 방식이다.

이 오름은 정상에 분화구가 있으나 이 분화구는 깊은 구덩이 형상이 아니라 넓고 평평한 형태다. 한남리 마을지의 표현대로 산 위가 펑퍼짐한 모양을 한다. 이웃하는 '사려니'와 대조가 된다.

사실 '넙'이란 '넓은'의 의미도 있지만 '평평한'의 뜻도 있다. 비슷한 위치에 나란히 있는 두 오름 중 위가 좁고 긴 즉, '소롬한 사려니'와 위가 '넓고 평평한 넙거리'를 비교하여 부르는 대비지명이다.

나머지 문제는 '거리'가 무슨 뜻인가이다. 어떤 책에는 표고 429.9m의 북쪽 봉우리와 436.6m의 남쪽 봉우리가 넓죽스럽게 갈려 있다는 데서 '넙거리'라 했다고 풀이했다. 즉, '거리'는 '갈리다'에서 왔다고 본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그렇지 않다. 측정치로는 남북의 두 봉우리가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뚜렷하지도 않고 갈려 있지도 않다. 평평하게 퍼져 있을 뿐이다.

'거리'란 북방어에서 '(낮은) 산'을 지시하기도 하고, 몽골 고어에서는 벼랑이나 급경사를 지닌 산을 지시한다.

거린사슴, 걸세오름 등에서도 보인다. 넙거리는 남쪽이 벼랑이라 할 만큼 급경사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넙거리'란 위가 평평하고 넓으면서 급경사의 낮은 산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30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