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강렬함으로 생각하자면 섬 제주에서 이곳만 한 지역이 없을 것이다.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대단위 촌락을 형성하고 살았던 유적지가 2002년에 복원이 완료돼 당시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삼양동선사유적지 사적공원에 들어가면 '이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갔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혹시 삼양동 주민들 속에 저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모래사장을 끼고 솟아나는 풍부한 용천수와 북쪽으로 터진 분화구 형태의 원당봉이 있고 당시에는 많은 부분이 우거진 숲이 있어서 농경과 어로, 수렵을 영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보물 제1187호 원당사지 5층 석탑(지금은 불탑사에 있음)에 얽힌 사연이다. 고려에서 원나라로 공녀로 끌려갔다가 황후의 지위에 까지 오른 기황후가 황태자를 얻기 위해 저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시에 원당봉 서쪽에 살던 주민들이 동원돼 불사를 거대하게 했다고 한다. 지명들이 뒷받침돼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웃모실, 정세미, 곱은터, 묵은터 등에는 토기 조각들이 발견돼 사람들이 살았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송신용 주민자치위원장
삼양동은 옛 지명으로 설개(삼양1동), 가물개(삼양2동), 버렁(삼양3동), 도련드르(도련1동), 맨돈지(도련2동)가 합쳐져서 인구 2만6000명이 넘는 지역으로 발전했다. 설촌의 시기와 사연이 각기 다를 정도로 독자적인 마을공동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에는 대형아파트 단지와 같은 주거형태의 변화를 통해 정주여건이 급속하게 도시화 되는 과정이다. 조상대대로 반농반어촌을 생업으로 했다. 바다와 인접한 관계로 어로활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비교적 많은 마을이었다. 검은 모래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삼양해수욕장은 마을의 상징과도 같다. 검은 모래 해변이라고 하는 명칭을 부여해 다른 하얀 모래 해수욕장과 차별화에 성공한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옛날부터 삼양 검은 모래에 찜질하는 것은 신경통과 관절염, 피부염, 무좀에 효험이 있다고 해 여름이면 많은 외지인들까지 찾아와 치병의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이러한 명품해수욕장이 지닌 독특한 관광자원 기능은 더욱 마을공동체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행정적 투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역경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 바닷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가 풍부하기로 삼양동을 이길 수 있는 마을은 흔치 않다.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바닷물 온도보다 낮은 시원한 담수로 몸을 헹굴 수 있는 여건이 제공되는 것이다.
필자에게 제주에서 가장 매력적인 산책로를 뽑으라면 주저없이 원당봉 산책로를 선택한 것이다. 불탑사와 문강사, 원당사 세 곳 사찰을 품은 오름의 중턱에서 한 쪽이 터진 분화구 형태를 오르면서 한 바퀴 도는 코스는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바다와 해안선 그리고 멀리 한라산까지 조망하며 느끼는 산행의 맛까지 즐길 수 있으니까.
송신용 주민자치위원장에게 삼양동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이자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항상 백년대계를 준비하고 실천하는 자세입니다." 선대에서부터 내려온 진취적인 마인드 속에는 애향심이 강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함께 협력하면서 '모두가 지역발전을 통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열린 자세로 임한다'는 지역공동체의 풍토이자 문화적 배경을 설명했다.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살아온 주민들의 의식구조가 인구의 급증과 도시화에 따른 다양한 사회적 요구 속에서도 더 멀리 내다보고 준비하고 이를 실천적 행동양식으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청년회와 부녀회원들이 모여서 준비해 아름다운 마을공동체의 모습으로 경로잔치를 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밝은 미래는 결국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자양분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햇볕가득 이어진 마을안길
<연필소묘 79cm×35cm>
삼양(三陽)의 뜻하는 세 개의 햇살을 찾아 마을 가름들을 돌아다니다가 해무가 살짝 밀려오는 오후 삼양3동에서 만난 눈부신 햇살. 天·地·人 세 곳에 모두 자리 잡은 저 길이 빛나고 있었기에 그렸다.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길. 집과 집 사이에 난 저 길은 얕은 높낮이가 그대로 유지된 그런 길이다. 그래서 더욱 정겹게 햇살을 받아 반사하고 있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소박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의 길이 이토록 눈부신 것은 하늘의 빛이 집이라고 하는 사람의 빛을 통해 땅에 전달되는 세 개의 볕, 삼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오후 네 시의 시간성을 담아내려 했다. 마을 이름이 삼양이라서 더욱 빛에 탐닉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회화적 도전이라 생각했기에 색채를 빼고 연필에 의한 명도를 가지고 빛을 표현했다. 옛 돌담과 시멘트 블록담장이 좌우에서 마주 보며 변하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대화하는 분위기다.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초가집이었던 저 길 양 옆에 발전된 오늘의 모습으로 변모했지만 소박하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은 사람들의 풍모가 집들 대문에서 발견된다. 꾸밈없는 최소한의 실용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다가오는 서민적 아름다움. 사람에게서 빛이 나고, 세상의 빛이 되려는 사람들의 마을, 그런 마을에 하늘과 땅이 도와서 이런 모습의 소박함을 풍경으로. 그림 속에서 발견하는 삼양은 사람의 향기가 얼마나 눈부신지 저 길을 따라 발견하고 있기에.
2천년을 이어온 아침
<수채화 79cm×35cm>
시간은 빛의 산물이라는 회화적 관점을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있었던 집의 모습을 통해 그리려 하였다. 아침이라는 빛이 올라와 어느 정도 일상의 눈높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활기차게 자신의 일을 하는 시간이다. 직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 속 곡면이 마치 자연물처럼 느껴진다. 저 당시에도 三陽의 개념은 있었겠지? 세 개의 햇볕!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 모습의 집을 통해 과일이 태양을 갈구하듯이 표현한 것이리라. 원시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한 공간감이 마치 고품격 조형물을 바라보는 것 같다. 특히 이런 아침광선과 조우하여 발생시키는 이미지를 통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표정 있는 신비감이 특정 시간에 발생되는 것은 햇볕에 대한 놀라운 수용 감각이라 찬사를 보내며 그렸다. 한반도의 역사로 생각하면 고조선이 융성하던 시기였기에 저기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있는 햇살에서 光明理世(광명이세) 이념의 발산을 느끼는 것은 과도한 상상이라 여기자. 닮았다. 멀리 보이는 원당봉의 능선과 저 움집의 형상이 어딘가 모르게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러하다. 이러한 사실을 견주어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서 그리려 하였다. 자연과 하나 돼 살아가는 삶이었기에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돼버리는 형태적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궁극 경지라고 주장하고 싶은 집이다. 굴뚝의 기능을 담당하던 지붕의 삼각형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어떤 주술적 의미까지 느껴진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한 삼양동 유적지에서.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