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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훈의 한라시론] 비석의 품격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입력 : 2019. 11.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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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보훈청이 11월 중 제주 국립묘지 착공 시점에 맞춰 박진경 대령 추도비를 다른 곳으로 옮길 예정이라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이 추도비에는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라는 내용이 써있고, '이에 우리 삼십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단갈(短碣)을 세우고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기리 전한다.'는 건립 취지가 적혀 있다.

제주 4·3 초기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던 제9연대 김익렬 중령이 강제 해임된 후, 미군정은 초토화작전을 밀어붙이기 위해 새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그의 연대장 취임사를 보자.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당시 제주의 인구는 30만이었다. 그는 취임사 내용대로 토벌작전을 밀어붙였고, 그 공로로 대령으로 승진했다. 진급 축하연에서 마신 술에 취해 잠을 자던 그는 강경작전에 반대하는 부하의 총탄을 맞아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죽었다.

6·18 의거를 주도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미군정하의 고등군사법원에서 내린 사형선고에 따라, 정부 수립 후 집행된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라는 딱지를 달고 총살됐다. 한편 1952년 11월 7일 제주 도내의 각 기관장과 유지들은 전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박진경 추도비를 세웠다.

장면을 바꾸어, 모슬봉 기슭 공동묘지. 신축민란의 장두인 이재수의 어머니 봉분 앞에 조그맣고 소박한 백비가 서 있다. 모서리가 둥근 말각형 묘비다. 앞면에 제주영웅 이재수 모 송씨묘(濟州英雄 李在守 母 宋氏墓)라 새겨있고, 1940년 3월 대정골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세 마을 주민 일동이 세웠노라 쓰여있다. 반란의 괴수로 죽임을 당한 이재수는 무덤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들 이재수를 잃고 상심했던 어미의 심정을, 이순옥은 그가 발간한 '야설(夜雪)-이재수 실기'에 이렇게 남겼다. "유명무실한 제주목사의 비석은 곳곳마다 세워져 있건만 어찌하여 도탄에 빠진 일반 백성의 원한을 풀고 인정을 펴준 나의 아들의 비석은 없느냐." 대정골 사람들은 어머니 송 씨가 세상을 떠나자, 어미묘비에 그의 아들을 '제주의 영웅'으로 새겨 추모했다.

박진경 추도비에 이어 송 씨의 백비를 말함은 비석의 품격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품격이란 모름지기 도덕적인 요소가 포함된 개념이다. 커다란 돌에 위민(爲民)과 충정(忠正)이라 새겨 억지로 추도한들 무슨 소용일까! 다만 네 글자 '제주영웅'이라 새긴 조그만 묘비, 감동이다.

보훈청에 전화를 걸어 박진경 대령 추도비를 폐기할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대답은 국립묘지 착공으로 다른 비석과 함께 옮길 뿐이지 추도비 존폐에 대한 그간의 논란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려니, 영혼이 없는 무색무취한 응답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어디 외진 구석에 숨길 것이 아니라, 제주4·3평화공원으로 옮겨 '반면교사'의 표징으로 삼아야 한다.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과거의 기록을 고치는 일이고, 또한 해원(解寃)의 노력이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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