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훈의 문화광장] 한천이 우리에게 묻는다

[현승훈의 문화광장] 한천이 우리에게 묻는다
  • 입력 : 2025. 05.27(화) 01: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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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제주 시내에는 도심 속을 관통하며 흐르는 건천이 있다. 도시 생활 속 시민들이 시외로 멀리 떠나지 않아도 일상에서 자연과 마주할 수 있는 하천 줄기다.

어린 시절 나는 동네 건천 중 하나인 한천에 내려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천변 큰 나무 사이로 일렁이며 스며드는 햇볕을 쫓아 내려가면, 둥근 돌들 사이로 이름 모를 생명체를 만나 친구가 됐고, 힘겹게 바위를 올라 걸터앉아 기암괴석 틈새를 요리조리 메우던 물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했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한천 하류인 용연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동네 어르신들은 건천 물가에 모여 빨래를 했고, 천변에서 채소를 가꿀 수 있었으며, 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밑은 그늘 쉼터이자 삶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요한 생활공간이었다.

그렇지만, 불과 30여 년 사이에 우리 일상과 함께해 온 건천에 다가가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도시화에 따라 일부 하천 구간이 복개되면서 도로나 주차장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수차례 발생하면서 제주 사회는 하천을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라산에서 용연까지 이어지는 건천 생태계에 340여m 가량의 인공 그늘을 드리운 한천 복개 구간이 있다. 용담동지(2001)에 실린 1990년대 건설 당시 사진을 보면 자연에 한 줌의 빛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구조물을 덮는 기세가 매서웠다. 오늘날 자연의 힘에 부쳐 철거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한천 복개 시설은 제주공항과 원도심을 잇는 차량 수요를 분산시키고, 지역 주민들의 주차 공간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2007년 태풍 '나리'와 2016년 '차바'가 북상했을 당시, 물살의 흐름을 방해하는 인공 구조물이 다수의 인명 피해와 침수 피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2019년 이곳은 유실 위험지구 '가' 등급으로 지정돼, 현재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 정비사업(2023~)이 한창이다. 기존의 복개 구조물을 전면 철거해 생태하천으로 복원하고, 하천 변으로는 도로와 주차장을 재차 만들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한천을 매개로 시행된 여러 정책 사이에 옳고 그름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지난 과거의 가치는 그른 것이고, 현재의 가치만 옳다고 여기는 이분법적인 결정의 태도가 눈여겨볼 문제다.

복개 구조물을 건설할 때는 자연을 배제하고, 다시 '생태'라는 이름으로 되돌릴 때는 복개 구조물을 완전히 없애야만 하는 것인가. 구조물을 시대적 자산으로 존중해 전체를 철거하지 않고 일부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보내온 시간 전체가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긴 호흡으로 시대 흐름을 이해하고 공존과 균형의 관점에서 역사 자체를 포용할 수 있다면 더 넓은 차원의 자연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현승훈 다랑쉬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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