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라에서 백두까지] (9)제국주의 침략과 도시 하얼빈

[2019 한라에서 백두까지] (9)제국주의 침략과 도시 하얼빈
안중근 의거 역사적 무대… 한반도·제주의 아픔과 연결
  • 입력 : 2019. 11.13(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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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현장 보존·전시관 조성
만주 주둔 관동군 제주 배치



지린성(길림성)·랴오닝성(요녕성)·헤이룽장성(흑룡강성) 등 동북3성은 한반도와 시대를 달리하며 밀접하게 얽혀있다. 하얼빈을 성도로 한 헤이룽장성 일대 역시 고대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이곳 만주 일대에 주둔했던 관동군이 제주로 이동, 일본 본토사수를 위한 결7호작전에 대비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이 보존된 하얼빈 역사 내부. 아래 둥근원 화살표 표시가 저격지점이고, 위 둥근원이 피격지점이다. 강희만기자

무엇보다 하얼빈은 우리에게 안중근 의사의 역사적인 의거로 기억되는 도시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그리고는 뤼순(여순)감옥으로 압송돼 1910년 3월 26일 그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올해가 안중근 의거 11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동시에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다. 탐사팀은 특별히 기억해야 할 역사적 의미가 큰 해의 흔적을 좇아 백두산 남파에 이어 하얼빈을 찾았다.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은 중국 정부에 의해 보존·관리되고 있다. 하얼빈 역사 정문 건물 왼편. 벽면에는 한문으로 '안중근의사기념관'이라는 가로 현판이 내걸려 있다. 기념관은 입구로 진입하면 안 의사 조형물이 전면에 배치됐다. 내부는 안 의사의 출생과 성장에서부터 거사 과정과 각종 사진·문헌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 강희만기자

특히 하얼빈역사 내 의거 현장은 특별히 보존되고 있다. 저격 지점과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지점은 직접 관람이 통제된다. 대신 기념관을 저격 현장과 연결시켜 내부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내부에서 저격 지점과는 불과 7~8m 정도다. 내부 바닥에는 저격 장소와 피격 장소를 표시해놓아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조국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병들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의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 강희만기자

의거 후 첫 심문장면에서 안 의사는 이같이 진술했다. 이 내용은 국가기록원이 지난 5월 공개한 극동지역 신문인 '쁘리 아무리예지' 1909년 11월 2일자에 실렸다. 안 의사는 처형되는 순간까지 의연하고 당당했다.

"내가 죽은 뒤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안 의사는 고국에 안장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유해조차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안 의사가 잠시 묻혔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하얼빈공원은 지금의 조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린공원은 안 의사가 하얼빈 도착 하루 뒤인 1909년 10월 23일 이곳에서 거사계획을 논의했던 장소다.

쑹화강을 가로지르는 중동철도.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강희만기자

이곳에는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청초당(靑草塘)' 글귀가 새겨진 유묵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매년 1~2월 하얼빈에서 열리는 빙등축제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하얼빈의 대표적 관광명소인 중앙대가(일명 러시아거리)와 성소피아성당 주변은 유럽풍의 건물이 즐비하다. 100년이 넘는 유럽풍 건물들은 하얼빈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중앙대가에는 안 의사가 거사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사진 찍었던 곳으로 알려진 '마리아호텔' 건물도 남아있다. 안 의사는 호텔 안 이발소에서 사진을 찍고, 일본 사람 복장으로 변장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 계획을 논의했던 조린공원. 강희만기자

하얼빈 도시 형성은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 역사와 관련돼 있다. 1896년 제정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철도부설권 획득을 전후해서다. 당시 러시아는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중동철도 부설에 나섰다. 하얼빈이 철도 중심지가 되면서 중국과 러시아, 러시아와 일본, 중국과 일본 간에 긴장과 대립이 지속된다. 1903년 중동철도의 개통은 바로 제국주의 침략을 가속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가 건설하고 일제가 침략 도구로 이용한 중동철도는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1907년 건립된 성소피아 성당. 강희만기자

제국주의 세력과 자본이 집중하면서 하얼빈은 1920년대 이미 '동방의 파리',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도 번성했다. 러시아 조차지에 이어 1920년부터 1931년까지는 중화민국이 주권을 회수했으나 곧 일제에 의한 만주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설립해 이 일대에 대한 지배에 나섰다. 이어 1937년에는 전면적인 중일전쟁에 돌입했다.

하얼빈의 대표적 관광명소인 중앙대가. 강희만기자

일제가 대륙침략에 나선 1931년 무렵은 제주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건설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일제는 처음부터 대륙침략을 염두에 두고 알뜨르비행장 건설을 구상했다. 이후 알뜨르비행장은 중일전쟁 당시에는 대륙 폭격을 위한 중간기지로 이용된다. 하얼빈의 역사는 곧 한반도와 제주도의 아픔과 연결돼 있다. <후원: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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