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주의 문화광장] 4·3예술 이후의 4·3예술

[김연주의 문화광장] 4·3예술 이후의 4·3예술
  • 입력 : 2018. 04.17(화)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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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함브르크 남쪽에 위치한 마을, 하르부르크에 1986년 높이 12m, 가로 1m, 세로 1m의 육면체 기둥이 세워졌다. 납에 도금을 한 이 기둥에는 철로 된 필기구가 모서리마다 매달려있어서 시민과 관광객은 기둥에 낙서를 할 수 있었다. 안내문에는 관람객에게 자신의 이름을 적으라고 되어 있었지만, 관람객은 이름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적고 갔다. 사람의 키 높이만큼 낙서가 채워지면 기둥은 낙서와 함께 땅 아래로 내려갔다. 관람객의 참여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7년 후인 1993년 11월 10일 기둥은 완전히 땅 아래로 사라졌다. 지금은 기둥의 꼭대기였던 윗면만을 바닥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라질 기둥을 왜 제작했을까?

조각가 요헨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게르츠는 1983년 함브르크시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선정되었다. 공모전의 주제는 "파시즘, 전쟁, 폭력에 저항하고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념비"였다. 게르츠 부부는 주제에 맞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작품에 파시즘, 전쟁, 폭력의 이야기와 평화, 인권의 이야기가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고민의 결과로 '반파시즘 기념비'를 만들었지만, 관람객의 참여와 함께 사라지는 기념비가 되도록 설계했다. 기념비가 사라진 텅 빈 장소가 될 때 관람객들이 "불의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 자신뿐"임을 깨닫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파시즘 기념비'는 땅 아래로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기둥이 낮아질수록 홀로코스트, 나치 등의 이야기는 기념비가 세워진 장소를 넘어 독일 사회로 퍼져나갔다. 기둥은 결국 작품이 아니었다. 기둥에 이름과 생각을 적는 행위, 기둥이 사라져가는 과정, 독일 사회로 퍼지는 논의 등이 작품이었다. 즉 게르츠 부부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기념비에 새겨 넣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찾는 사람과 독일 사회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기억이 새겨진 사람과 사회가 불의에 대항해 평화와 인권을 지키길 촉구한다.

4·3예술은 4·3 직후의 세대에게 이야기되지 못해 한때 잊혔던 4·3을 다시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4·3을 제주도 밖으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올해는 4·3 70주년을 맞아 제주도는 물론 서울에서도 다양한 행사, 공연, 전시 등이 열리고 있다. 이러한 행사로 인해 4·3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이름도 갖지 못한 4·3이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4·3 70주년이라고 유독 많이 열리는 행사들을 보면서 우리가 4·3을 작품 안에만 담아놓고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반파시즘 기념비'는 위로를 주는 예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갖게 했고 아픔을 상기시켰으며 논란을 가져왔다. '반파시즘 기념비'는 4·3을 기억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기억은 작품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과 사회에 있어야 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사람마다 4·3의 기억을 갖고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불의에 대항할 수 있고, 작품이 이야기하는 평화와 인권이 사회에서 실천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4·3예술이 갖는 중요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4·3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술이 있었기에 이제는 4·3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만드는 예술을 기대할 수 있다. 앞으로의 4·3예술은 4·3이 우리의 일상에서 이야기될 수 있도록 논의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연주 문화공간 양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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