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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라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클레의 천사
안세화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6. 01.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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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박주우 작가

이 글은 원이와, 원이와 같은 아이들과,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것이다.

새로운 천사는 과거를 본다.

천사는 단 하나, 유일한 파국만을 본다. 그 파국은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올리며 그것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진다. 천사는 기꺼이 그 자리에 머무르며, 죽은 자들을 흔들어 깨우고 부서진 것들을 다시 결합하고자 한다. 하지만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 때문에 이제 그는 날개를 접을 힘도 없다. 폭풍은 쉴 새 없이 천사를,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밀어댄다. 그 사이 천사의 앞에 쌓인 폐허의 더미는 하늘까지 다다른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다.

*

2013년 8월에 기록된 배영종 신부의 비망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서두는 상당히 의외였다. 그는 일생 동안 성당의 아이들만 생각했을 뿐, 그림이나 음악에는 무지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벤야민이 클레의 그림-새로운 천사(1920)- 에 대해 논한 구절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뜻밖이었다.

신부는 다음 단락에 이렇게 적었다.

"어느 세대나 젊은이들은 둥지를 떠나지 못해 안달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향하는 어느 곳에서나 환영 받을 줄로 착각한다. 섣불리 길을 나서는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길에 끝에 반드시 성공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허무맹랑한 죽은 신화와 미완의 실패만을 희망한다. 그래서 실패를 거듭하고 명백히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에도, 자신들의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으며 쓰러진다.

적어도 난 일찍이 나의 성공이 바깥 세상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아니다. 그보다 바깥 세상에 더 많은 실패가 있음을 알았다. 어머니가 이곳에서 길러낸 아이들 중 아직까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는 나뿐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아랫도리가 수시로 불끈댈 무렵부터 어디론가 떠나지 못해 안달을 했다. 그리고 한 번 떠난 이들은 반세기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 전, 원이가 돌아오기 전까진.

나는 원이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깨끗한 셔츠에 린넨 재킷을 갖춰 입고, 한 손엔 종합음료 박스를 든 채였다. 44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마르고 움직임이 가만하며 선선하게 웃었다. 나는 노년에 접어든 그에게서 언뜻 소년 때의 그를 보았다. 그래서일까? 다행히 우리는 억지로 친한 척을 하지 않으면서도(아무튼 44년이란 세월을 무시할 순 없었다), 어색하지 않게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원이의 용건은 간단했다. 열흘 간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그냥 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덧붙여 숙식비는 부르는 대로 내겠다고 했다. 나는 원이에게 숙식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오랜 시간 떠나 있었지만, 어쨌든 이곳은 한때 그의 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숙식비는 되었으니, 원하는 만큼 머무르라고 했다. 원이는 그럴 수 없다고 했고, 우리는 한동안 돈 문제를 두고 실랑이를 해야 했다. 결국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여기까지 적고 배영종 신부는 두 페이지를 비어두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그가 보름간 1961년 파일을 찾으러 얼마나 애썼는지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창고를 뒤지다 10년은 족히 된 쥐덫에 손가락이 잘릴 뻔 했다는 사족도 있었다. 어쨌든 신부는 끝내 1961년 파일을 찾지 못했는데, 이는 그 파일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결국 신부는 파일을 찾는 대신, 그 시절에 대한 기록을 스스로 작성하였다.

1년 전, 배영종 신부가 어린 아이둘을 구하고 화재 현장에서 사망한 후, 나는 그의 유품에서 이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에 따라, 그의 기록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작업을 시작하였다. 원문은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단지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고, 비문을 수정하였다. 비망록은 시기상 총 3부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다음은 서론의 마지막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나는 결국 파일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1961년도의 아이들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생생한 증언자가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나 자신이 그 아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사실 원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이런 기록을 남겨 둘 마음이 없었다. 그만한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으며, 매일매일 다시 쓰여 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이를 다시 떠나보낸 지금, 나는 반드시 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의무감마저 느끼고 있다.

이 글은 원이와, 원이와 같은 아이들과,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어른들을 위한 것이다."

1.

1954년, 수녀원장이 고아가 된 먼 친척뻘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이후 몇 해에 걸쳐 성당에는 알음알음 기댈 곳 없는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한 해에 10명가량의 아이들이 맡겨지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딱히 고아원을 겸하고 있지 않았던 성당은 임시방편 식으로 필요를 채워갔다. 뒷마당에 창고는 급하게 숙박시설로 개조되었고, 수녀들은 자신의 식사를 여러 등분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수가 반백 명을 육박하면서 성당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졌다. 부엌일을 봐 주는 대신 성당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통칭 '어머니'라는 여인은 쌀독에 바닥이 드러나면, 잠자코 감자나 옥수수를 삶았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정부나 타 기관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끼니를 감자 몇 덩이로 때우는 날들이 많아지며 아이들은 눈에 띄게 말라갔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굶주린 수녀들의 눈길도 나날이 차졌다.

수녀원장의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1961년, 그녀는 마침내 성당에서는 더 이상 어떤 아이도 받을 수 없다고 마을 안팎에 선포했다. 그들이 거두고 보호해야 하는 아이가 세상 밖에 단 한명이라도 더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신께 묻고 물어도 수녀원장은 끝내 그 답만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지독히도 현실적인 이유로, 경기도 변두리에 위치한 소돌 성당의 문은 7년 만에 닫혔다. 그리고 그곳에 몇 해에 걸쳐 모인 쉰 세 명의 아이들은 '소돌 성당 고아원'의 원형이 되었다.



우리 중 부모를 찾은 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1959년에 들어 온 열두 살, 성규였다. 그의 부모는 부산에서 잃은 아들을 찾아 전국을 뒤지다 이곳까지 다다랐다고 했다.

너희들이 정말로 그리울 거야. 성당을 떠나기 직전, 성규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우리도 모두 알았다. 하지만 어둔 숲을 바라보는 것과 그 숲에서 살아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성규는 이미 부모가 뿌려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쫓아 숲을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은 친구들에겐 그를 잡을 권리가 없었다.

성규가 떠나던 밤은 유난히 크고 노란 달이 떴다. 우리는 조금은 널널해진 잠자리를 위안 삼으며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리는 성규가 떠나기 이전보다 더 비좁아져 있었다. 그 밤 그가 떠난 자리를 아이들이 적의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아. 그것이 시작이었다. 곧 변변치 못한 사연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큰누나가 내 손을 잡고 여기로 왔던 걸 똑똑히 기억해, 그 인간은 곧 돌아온다는 입 바른 소리조차 하지 않았어, 난 그냥 철로 옆에서 발견됐다는데 뭐.

우리는 음지에 심긴 씨앗들이었다. 제 발로 이곳을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 자라야만 했다. 꿈에라도 헛된 기대를 품지 않기 위해 자해하며, 성당 밖 세상을 쟁취해야 할 땅으로 삼으며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릇된 신화는 이 날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졌던 것 같다.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밤이었다. 바깥에 달이 너무 밝았다.

잠시, 나도 친구들을 따라 부모님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곧 그만두었다. 나는 아버지 쪽 친척이라는 수녀원장과 함께 성당의 담을 넘었다고 들었다. 내 나이 두 살 때 일이다. 이곳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집이고, 나는 누구를 저주해야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 사이에도 아이들의 자해는 끊이지 않았다. 외로운 사람과 지친 사람과 화난 사람이 함께 있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리 만무했지만, 최소한 세상이 내게만 가혹한 것은 아니라는 위안은 얻을 수 있었을 거다.

잠이 들기 전, 나는 옆 자리에 누운 친구를 보았다. 내 옆엔 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올린 원이가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가 울음을 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정말로 슬퍼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원이는 마흔 몇 번째로 들어온 아이였다. 그가 들어온 날은 유독 더웠다. 원이는 또래만큼 말랐지만, 또래보다 키가 컸다. 그래서 수녀원장이 친구라고 소개시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종종 형처럼 여겼다. 그때 원이는 아홉 살이었는데, 그를 제 나이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이를 처음 본 성도들은 모두 그가 열 살은 훌쩍 넘겼을 거라고 예상했다. 이제 와 얘기인데, 사람들이 원이를 제 나이보다 성숙하게 본 이유가 꼭 큰 키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소돌 성당은 시멘트로 아무렇게나 바른 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이들은 주로 성당 쪽에 큰 터에서 놀았다. 그곳에선 알아서 자라는 꽃나무 몇 그루가 매년 피고 지고했다. 나무 밑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목제 의자 하나가 있었는데, 원이는 많은 시간을 그 의자 위에서 보냈다. 그 애는 뛰지 않는 아이였다. 다른 친구들이 웃통을 벗고 땀 흘리며 뛰는 여름에도, 헐벗은 눈사람 하나를 만들려고 맨손으로 동분서주 눈을 모으던 겨울에도, 원이는 의자에 앉아 허연 얼굴로 하늘과 친구들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그렇게 꼭 한 해가 지나고, 여름이 가을로 물들던 어느 날, 원이는 마을에서 무딘 칼 하나를 구해왔다. 그는 나무 아래서 그 칼을 연신 갈았다. 그리고 의자의 다리와 등받이에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썩은 흔적이 역력하던 의자엔 며칠 새 그럴듯한 성모상 조각이 새겨졌다. 원이는 좋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그의 업적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겨우 장난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고작 열 살이었던 그때의 그는 자신의 첫 작품에 만족했다.

그가 조각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의자를 깎은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그는 새로워진 의자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주력했다. 그 시절 원이가 그리는 그림은 대개 비슷하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 그는 이상하리만치 그 풍경에 집착했다. 구름의 모양과 바람의 방향, 나무의 생장에 따라 미묘히 다르긴 했지만 대상 자체가 변화하는 경우는 없었다. 가끔 종이가 떨어질 때면, 글자가 빼곡한 성경 한 장을 몰래 찢어서라도 원이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그림을 계속 그렸다.



이쯤에서 확실히 해두어야 할 점은, 원이가 재능은 출중하나 다소 부끄럼이 많고, 친구들 앞에서 말을 더듬는 부류의 천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이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소외 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확실한 아이들의 일원이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노는 일에 열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암기를 잘하거나, 길을 잘 찾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이는 타고나기를 사람을 홀리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원이의 좋은 손보다 이 재주를 더 탐내했다. 원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말을 하면 자신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에게 귀 기울였고, 그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꼭 알은 체를 하려 들었다. 대장 노릇을 즐겨 맡던 아이들도 원이에게만은 고분한 말씨를 썼다. 이즈음 원이는 자신의 새로운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잦았는데, 그가 쓰는 종이와 연필은 모두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구해다 주는 것이었다. 특히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젊은 처녀가 가지고 오는 것이 가장 질이 좋았다.

어느 사람인들 쉽게 잊히겠느냐만, 원이는 한 번 알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음지에 심긴 씨앗들이었다.
제 발로 이곳을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 자라야만 했다.

다시 원이의 손 이야기에 대해 하자면, 그의 실력은 날로 좋아졌다. 그는 연필 하나로 수십 가지의 하늘을 그릴 수 있었다. 그때쯤엔 친구들의 초상화 정도는 눈 감고도 그렸다. 아이들은 유행처럼 원이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종이만 구해오면 원이는 기꺼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머지않아, 성당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초상화 하나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부탁하는 아이들이 몇몇 생겼다.

그런 부탁은 주로 밤에 행해졌다. 아이들은 희미해진 기억을 깨우며, 원이를 붙잡고 누군가의 초상을 남기고자 했다. 그 대상은 아버지일 때도 있고, 어머니일 때도 있고, 형제자매나 할머니 일 때도 있었다. 아무튼 모두 성당 이전의 세상에서 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아이들이 원이에게 대상을 묘사하면, 원이는 몽타주를 그리듯이 그들을 그려주었다. 부탁이 밀릴 때면 그림 하나를 받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걸 괘념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넘쳐나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림이 완성되면 원이는 그것을 의뢰자에게 은밀히 전달하였다. 이렇게 받은 그림은 누구도 대놓고 꺼내보지 않고, 그저 품속에 깊이 넣고 간직하였다. 지나가는 유행 같은 것이었다.

너는 그려두고 싶은 사람 없어? 언젠가 원이가 나에게 물었다. 그는 담에 등을 대고 앉아서, 여느 때처럼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다른 이의 그림을 부탁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별로 또는 글쎄 정도로 대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너는 누구의 그림을 가지고 있는데? 라고 되물었다. 난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어. 원이는 그림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왜? 넌 아홉 살에 들어왔잖아. 생각나는 사람 없어? 내가 다시 묻자, 그는 여전히 손을 놀리며 말했다. 생각난다고 다 그립나 뭐.

나는 원이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았다. 여자라고 하기에는 앳된 티가 역력한 소녀의 실루엣이었다. 아마 누군가의 큰누나쯤일 것이다. 나는 누구의 부탁이냐고 물으려다가 관두었다. 남의 사생활을 또 다른 남에게 묻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나는 그냥 원이 옆에 앉았다. 그처럼 담에 등을 대고 앉아, 떠가는 구름을 보았다. 바람이 살살 불어왔고,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주위에 가득했다.

원이를 떠올리면 나는 왠지 이 날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는 내가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원이에게 묘한 유대감을 느낀 날이었다.

2.

훗날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배영종 신부는 1963년에서 1965년 사이의 기록을 남기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신부는 처음 비망록을 쓸 당시 이 시기를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 해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모든 이야기는 하나마나한 것이다. 때문에 신부는 여러 번의 수정 끝에 이 부분을 가장 마지막에 첨가하였다. 그는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면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등의 방어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는 자신의 묘사가 혹여 요한 신부를 왜곡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다음은 그 시기에 대한 정리본이다.



1963년에서 1965년은 요한 신부가 소돌 성당에 부임했던 해이다. 그는 언제나 희끗희끗한 머리를 바짝 깎고, 수단을 걸친 깡마른 등 뒤로 뒷짐을 지고 다녔다. 누구도 그가 큰 소리로 웃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또한 그가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도 본 이가 없다. 마을 내에선 그가 해방 전 독립투사였다는 소문과 친일파였다는 상반된 소문이 떠돌았다.



"살다 보면 대가 없이 잃기도 하고, 선물같이 얻기도 하는데,
잃을 때마다 미움을 남기면, 얻을 때는 무엇으로 갚겠니"

처음 부임하고 몇 달 동안, 그는 오로지 신부로서의 업무에만 충실하였다. 신부는 우리의 학교 일 같은 건 도통 관심이 없었다. 미사 중, 자는 아이들을 굳이 깨우지도 않았다. 무엇이 되고 싶으냐, 고민이 무어냐, 일일이 묻는 일도 없었다. 그저 볕 뜨거운 날, 마당에 사내아이들을 죽 세워두고 등목을 해주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아니, 그가 그 일이 전부이기를 바랐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지내다보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고, 너의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소리나 하며 유유자적 지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큰 아이들은 걸핏하면 작은 아이들을 때렸고, 여자 아이들은 못된 소문을 만들어 퍼뜨렸으며, 남자 아이들은 몰래 여자 아이들 숙소에 들락거렸다. 점잖은 수녀들이 분에 겨워 발을 구르는 것쯤은 흔한 구경거리인 이곳이었다. 수녀들에게 귀를 잡히고 끌려온 아이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은, 소돌 성당에 부임한 신부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곳 아이가 훔쳐간 떡 값을 받으러 왔다는 시장 사람과, 이곳 아이와 큰길에서 싸움을 벌였다는 어르신을 달래 보내는 것도 신부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신부는 조용히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수녀원장에게 말했다. 자신에게 벌을 받은 아이들이 뒤에서 시팔 시팔 험담을 하는 건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이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 탓에 정신이 사나워서 지낼 수가 없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욕지거리 뒤로 들리는 속 곪아가는 소리가 전점 선명해져서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가 없다고 말이다.



요한 신부는 꽃나무에 커다란 모래주머니를 걸었다. 그리고 열불이 나는 일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 모래주머니를 걷어차라고 했다. 그래도 몸에 불이 가시지 않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신부의 방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처음에는 사내아이들 몇만이 장난삼아, 운동 삼아 모래주머니를 가지고 놀았다. 누구도 그런 것이 아이들의 혈기를 수그러들게 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수녀들은 처음 이곳에 온 신부들이 늘 그렇듯, 요한 신부가 괜한 일에 힘을 빼고 있다고 했다. 찬거리를 들고 하루에 수차례씩 뒷마당을 지나다니는 어머니 역시 모래주머니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 계절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자, 수녀들은 보기 거추장스러우니 그만 주머니를 떼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부는 한사코 주머니를 걸어놔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즈음 그는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그 해 가을이 가기 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린 애 하나가 신부의 방을 찾아왔다. 아이는 대뜸 억울하여 못 살겠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흥분하여 말을 더듬고 있었다. 신부가 이유를 묻자, 아이는 자신이 학교에서 상으로 받아 온 학용품이 며칠 전에 모조리 사라졌는데, 오늘 형 몇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 걸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 물은들, 형들이 곧 죽어도 네 것이 아니라니 다른 도리가 없어 모래주머니만 실컷 차다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머리로도 힘으로도 형들을 이길 수 없는 아이가 선택한 최후의 보루였다. 아이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았다. 신부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신부는 그 길로 아이를 데리고 시내로 갔다. 그리고 아이가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학용품을 사주었다. 돌아오는 길엔 꽈배기도 사주었다. 그 아이의 말에 따르면, 신부는 꽈배기를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 세상은 가끔 불공평해 보일 때가 있지. 누군가는 좋은 패를 쥐고 있는 것 같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 하지만 오래 억울해하지 말거라. 패는 계속 섞이기 마련이니. 앙금도 남기지 말거라. 살다 보면 대가 없이 잃기도 하고, 선물같이 얻기도 하는데, 잃을 때마다 미움을 남기면, 얻을 때는 무엇으로 갚겠니."

그날 이후 신부의 방엔 많은 아이들이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모래주머니로 분을 풀 수 없는 화나고 억울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곧 고민이 있거나 심심한 아이들도 신부를 찾았다. 아이들은 더 이상 먹을거리를 찾아 시장을 들락거리지 않았다. 시비를 걸려고 대로에서 서성이지도 않았다. 신부의 방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곳이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아이들은 신부의 서랍에 무엇이 있는 지까지 낱낱이 알았다.

수녀원장은 신부에게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그때마다 신부는 자신이 하는 일이라곤 가끔 모래주머니를 교체해 주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지나친 겸손이었으니, 당시 그는 성경 공부방과 영어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아이들과 농구하는 시간도 따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에게서 처음 성경을 배웠다.



나는 원이에게 함께 성경을 배우자고 제안했다. 그때까지 원이는 신부가 운영하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요한 신부에게 관심이 없었다. 매일같이 놀고 머물던 꽃나무에 모래주머니가 걸린 이후로, 새로운 아지트를 찾기에 바빴을 뿐이다. 학교에서 성당으로 오는 길에 자리한 둑길이 원이에겐 최적의 후보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고전을 탐독하거나, 중력과 자기장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성경을 배우는 일은 거절하였다.

원이와 한 학급에서 공부하고, 매일 30분이 넘는 등하굣길을 함께 하며 나는 누구보다 생생히 '원이의 진화'를 목격하였다. 확실히 그는 손재주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두루 우수했다. 저 아이는 뭐가 돼도 될 거야, 자신들이 이룩하지 못한 미래를 재주 많은 꼬마에게 거는 데 익숙한 어른들은 원이를 보고 곧잘 말했다. 담임선생님은 학부형에게서 받은 귀한 과자를 원이에게만 몰래 주었고, 수녀들은 대청소에서 원이만 제외시켰다.

오직 요한 신부만이 그를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보지 않았다. 이제 와 하는 소리이지만, 나는 원이가 자신을 특별하게 대하지 않는 신부에게 불만을 가졌었다고 생각한다. 신부는 원이에게만 무엇 하나 더 해주는 법이 없었다. 원이에게 미래를 걸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어깨 위에 떨어진 꽃잎을 털어주며, 꽃 한 송이라도 짊어지지 말라고 했을 정도다. 그 해가 지나도록, 모두가 닳도록 드나들던 신부의 방문턱을 원이만 넘지 않았다.

하지만 원이와 신부의 서먹한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으니, 그 단초가 된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어느 날, 원이는 친구들로부터 신부의 방에 이상한 그림책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성당 담벼락에나 그려질 법한 장난 같은 그림들인데 그게 무지하게 비싸다는 것이다. 신부에 관한 얘기라면 언제나 심드렁하던 원이도 그 책에게 만큼은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미사가 끝난 후, 신부를 쫓아가 넌지시 책에 대하여 물었다. 신부는 그 책이 궁금하면 직접 빌려가라며 원이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신부의 방에는 잡다한 분야의 책이 천장까지 쌓여있었다. 신부가 원이가 말한 책을 찾으려고 온 방을 헤집는 동안, 원이는 신부가 준 차를 마시며 책장을 꼼꼼히 눈으로 훑었다. 한참만에야 신부는 원이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표지엔 '유럽의 추상주의'라고 쓰여 있었다.

이후, 원이는 신부의 방에 자주 들락거렸다. 신부가 가지고 있는 미술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은 후에는 역사책이나 소설도 빌려갔다. 하루는 신부가 말했다. 아이들이 그러더구나, 모두들 네가 그려준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고. 평소처럼 책장 앞에서 서성대던 원이가 그렇다고 했다. 그럼 나도 하나 그려주렴. 원이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선뜻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저녁에 당장 신부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신부는 원이가 그린 그림을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참 귀한 재주를 가졌구나, 했다. 그리고 앞으로 금요일 저녁마다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아무래도 너에게 주어야 할 게 있는 것 같다며.

매주 금요일. 신부는 원이에게 미술사를 가르쳤다. 음악과 건축, 다른 나라의 철학 등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모두 학교에서는 좀처럼 배우기 힘든 것들이었다. 나의 기억에, 이 무렵 원이는 조금 들떠 있었다. 하굣길에서 그는 신부에게 배운 것들을 몽땅 내게 일러주려고 애를 썼다. 클레라는 화가와 그의 천사 작품에 대해서도 이때 들었다. 원이의 얘기는 대부분 흥미로웠다. 물론 알아들을 수 없는 주제도 적진 않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원이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가 너무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이 당시에 흥에 겨워 말이 많아진 이가 꼭 원이만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그러했다.

요한 신부가 부임한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신부는 여전히 조용히 지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수녀원장에게 말했다. 이제는 아이들 속 썩어가는 소리가 안 들려서 살 만하다고 말이다.



삽화= 박주우 작가

생전에 배영종 신부는 지인들에게 종종 말했다고 한다. 요한 신부가 단 5년만 더 살았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고. 적어도 1961년의 아이들이 그 같이 흩어지진 않았을 거라고. 지인 중 한 명이 물었다고 한다. 요한 신부와 함께 했었던 다른 어른들은 그가 죽고 나서 무얼 했나요? 그 질문에 배영종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1965년, 요한 신부는 췌장암의 발병으로 65세에 흙이 되었다.

배영종 신부는 그의 비망록에 요한 신부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히만 적었다.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신부는 강단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그의 두 눈과 양 볼은 푹 들어갔고, 입술은 마른 나무의 색과 같았다. 누가 보아도 회복불능한 병인의 모습이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은 강대상을 꽉 잡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한참 만에 여전히 강단에 선 채로 그가 말했다. 너희는 모두 세상에 스스로 난 체한다. 하지만 진실은 이거다. 너희는 모두 한 번은 버려졌다. 이곳에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뜻밖의 말에 우리는 동시에 신부를 올려보았다. 신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희는 언제나 성실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런 사랑을 부정하는 편이 너희가 그걸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보다 쉬웠으리라는 거 안다. 영광과 권좌가 용서와 화해보다 달게 느껴지는 것도 안다.

그의 목소리가 손 못지않게 떨려왔다. 그날 그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그가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울며 마지막 말을 했던 것 같다. 얘들아. 나는 너희들의 성실한 보호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구나. 너희들은 스스로 믿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성실한 사랑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날아가라. 너희는 모두 크고 강한 날개를 가졌다.

신부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수녀와 아이들 그리고 마을 대표 몇 사람만이 참석한 조촐한 식이었다. 때 이른 죽음에 곡소리가 나는 장례식을 흉 볼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아무도 공연한 소란을 일으키진 않았다. 각자 자리에 서서 눈물을 비치거나 삼킬 뿐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서서 모든 식을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3.

1965년부터 1970년 사이를 배영종 신부는 암흑기 또는 해체기라고 표현했다. 전반적으로 성당의 분위기가 험악하고, 침체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비행은 어릴 때의 장난질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로를 향한 무관심과 불신도 상당하였다.

그 시절의 끝에 거의 모든 소년들이 성당을 떠났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들의 추락을 예견하였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아이들은 순리대로 소년, 소녀가 되었다. 해는 매일 뜨고 지는데,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매일 지기만 한다. 우리는 여전히 어리고, 배워야 할 것이 많았지만, 더 이상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솔한 어른들은 벌써부터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것이라고 재단을 하기도 했다. 섣부른 짓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재단이 아주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요한 신부가 죽고 꽤 오랜 시간, 원이는 신부의 그림만 그렸다. 그 무렵, 그는 부쩍 말이 없어졌다. 간혹 신부가 생전에 들려 준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 자신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이가 땅만 보며 걷는 사이, 아이들은 다시 시장으로 대로로, 발길 닿는 곳으로 갔다. 신부가 없는 일상은 신부가 있던 세월 위로 쌓이며, 금세 그 흔적을 모두 지웠다. 그의 바람은 그의 비석 아래에 묻혔고, 무럭무럭 커가는 소년들은 어느새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다음에 부임한 신부의 방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다.



우리 중 발육이 남달랐던 몇몇은 열여섯을 넘기며 제법 청년 티가 났다. 그들은 일찍 성인들의 기호품을 접하고, 성인들의 유희를 탐했다. 특히나 철훈이가 그런 일에 가장 앞장섰던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 철훈이는 열일곱 살이었고, 덩치가 제법 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매일 밤 어머니가 숙소에 불을 끄고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잠든 친구들의 머리맡을 까치발로 지나 숙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새벽에 소리 없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구부러진 철사를 문 사이에 끼워두었다. 철훈이의 모험담은 대개 이러했다. 일단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성당 담을 넘는다. 그리고 컴컴한 대로가 나올 때까지 달린다. 대로에서 할머니국밥 집을 끼고 왼 편으로 꺾으면 골목 하나가 나오는데, 그곳이 그의 목적지이다. 골목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헛기침을 하면, 골목 저편에서 여자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언제나 차림새가 비슷한 낯선 여자가 나와 철훈이를 맞는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일 때도 있고, 그보다 더 들어 보이는 여자일 때도 있다. 철훈이는 약속된 금액을 그녀에게 쥐어준다. 그리고 그녀를 골목 깊이 데리고 들어간다.

날이 밝으면 건장한 소년들은 철훈이 곁에 모여들었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피곤에 절어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철훈이는 자신의 새로운 여자친구에 대해 세세히도 묘사하였다. 오래지 않아 철훈이의 비행에는 체격 좋은 몇 명의 친구들이 가담하였다. 그들은 순번을 정하고 서로 망을 봐주며 수녀들 몰래 밤마실을 즐겼다.

철훈이의 손길은 늘 또래보다 키가 컸던 원이에게도 미쳤다. 그때 원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원이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숙소를 빠져나갔다. 어머니가 불을 끄고 나가면 잠시간 고요하던 잠자리는 곧 몇 놈들이 일어나는 기척으로 복잡스러워졌는데, 원이도 이때를 틈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머니에는 시내에서 그림을 팔아 번 돈이 들어있었다.

나는 원이를 붙잡고 싶었다. 아무런 감동 없는 눈으로 허공만 쳐다보고 있을 여자와 그녀를 안을 원이가 싫었다. 실제로 나는 그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아홉 살 때부터 나란히 잤고, 그는 내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번이, 나는 원이를 잡지 못하였다. 나에게 그를 잡을 권리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낼까봐 두려웠다. 그즈음 그와 나의 사이는 서로에게 아픈 충고를 하고도 뒤돌아서면 아무렇지도 않을,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나는 한 번도 그를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갈 때까지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 무렵, 무리가 커지면서 철훈이는 자신의 비행에 가담하지 않는 친구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의 무리에게서 어른들에게 꼰지르지 말라는 협박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그런 협박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난 고자질 같은 거, 할 마음이 없었다. 우리는 이미 방향을 정하고 마구 뻗어나가는 가지들이었다. 가지를 꺾지 않고는 이제 그 가는 길을 틀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요한 신부의 마지막 말은 잊힌 지 오래였다. 우리 중 성실한 사랑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는 친구도 믿지 않았다. 크고 강했던 날개는 털이 몽땅 빠지고 뼈대만 남은 채 우리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이 틀어졌으며, 더 많은 것이 달라질 터였다.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고자질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마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녀의 고향이 어딘지, 어쩌다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지, 어떤 반찬을 가장 좋아하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기는 했는지.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녀가 전쟁 직후, 우리들보다 조금 먼저 성당에 흘러들어 왔다는 것뿐이다.

그녀도 한 때는 진짜 누군가의 어머니였을까? 말 많은 동네 할머니들은 어머니의 궁둥이를 보고 아이를 푼 몸이라며 저들끼리 숙덕였다. 누군가는 그녀가 전쟁 중에 온 가족을 잃고 떠돌게 된 것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녀가 미군에게 겁탈 당해 낳은 아기를 유기하고 이곳에 온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북에서 온 끄나풀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돌아가지 못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험한 시대였으므로, 소문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말 없는 사람에 대한 소문은 늘 실재보다 무성한 법이다. 어쨌든 어머니가 끝내 모든 소문에 대해 함구하면서 실상은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굉장히 험한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뿐이었다.

삽화= 박주우 작가

그녀 역시 날개를 잃고 떨어진 누군가의 가여운 딸이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보기 위해 돌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날개는 찢기고 젖어 있었다
방치된 채,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므로 새벽에 우리의 방에 들어와, 아이들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만보다 나가던 그녀를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사정 모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처럼 그녀가 우리에게 무관심하진 않았다고 믿는다. 그저 타인의 생에 개입을 하기엔, 자신의 생에 너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 철훈이 무리를 붙들고 어른다운 훈계를 하지 않았다 해서 어머니의 인생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 역시 날개를 잃고 떨어진 누군가의 가여운 딸이었다. 다만, 어머니가 우리의 방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다 간 날엔, 비어있는 원이의 자리가 더 차고 쓸쓸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오래지 않아 철훈이가 성당을 떠났다. 성규가 떠난 이래, 오랜만에 나오는 두 번째 이탈자였다. 처음 그가 떠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아직 이르다,라고 했다. 당연히 철훈이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십 수 년을 넘게 어머니의 밥을 먹어온 우리는 어머니가 결국 그를 붙잡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가 떠나던 아침, 어머니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식당에서 식판을 집는 철훈이를 저지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앉히었다. 어머니의 방은 우리의 숙소와 식당 사이에 있었다. 세 평 남짓 되는 방과 작은 책상, 행거가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행거에 있는 옷 몇 벌은 모두 우리의 눈에 익히 익은 것들이었다.

철훈이는 30분가량 혼자 방에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그의 상을 따로 준비하였다. 나도 어머니의 옆에서 그녀를 도왔다. 새벽부터 끓인 고깃국과, 부친 계란, 마을 할매들로부터 일찍이 얻어둔 콩잎, 눈알까지 바싹 익힌 조기, 담 밑에 난 부추로 만든 부추전과 텃밭에서 막 뜯은 고추, 작년에 담근 김치와 장을 반듯이 담아 올린 상이 곧 차려졌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자, 철훈이의 무리들이 그 주위를 기웃거렸다. 나중에 그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어머니는 철훈이가 상을 싹 비우는 동안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다. 평소처럼 체한다, 꼭꼭 씹어 먹어라, 정도의 말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철훈이가 식사를 마칠 때 쯤 물 한 사발을 떠다 주었다고 한다. 참 어머니다운 작별 인사였다.

이후 반세기 동안 철훈이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선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떠난 후 세 번째, 네 번째, 그 이상의 이탈자들은 빠르게 나타났다. 구체적인 포부를 갖고 있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혼자 나가는 경우도 있고, 두세 명이 뭉쳐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향하는 어느 곳에서나 환영 받을 줄로 착각했다. 허무맹랑한 죽은 신화와 미완의 실패만을 믿고 떠났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들 모두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나름의 방식대로 작별을 고하였다.

원이는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자신이 다른 아이들처럼 서둘러 나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 원이는 전국적으로 열린 예술 경연에 도대표로 나갔다. 비록 대상은 문화부 차관의 조카가 차지하였지만, 어쨌거나 그 이후로 원이를 후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그들 중 적극적인 몇 사람은 직접 성당으로 찾아와, 원이를 대면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하나같이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원이는 그들에게서 후원에 대한 열의와 범위를 듣고, 더 나은 입찰자를 선정하기 위해 고심 중이었다.

이즈음 나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나는 신부가 되고 싶어. 텅텅 빈 식당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신을 사랑한다면 의미 있는 일이지. 내 앞에서 한 손으로 책을 들춰보며 밥을 먹던 원이가 말했다.

그 해 말, 마침내 원이는 미국에서 온 중년 남자를 따라가겠다고 결정했다. 그 남자는 원이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유학비용을 지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원이가 떠나던 날, 어머니는 고기를 떼러 시장으로 갔다. 그것이 그녀가 차리는 마지막 상차림이었다.

1970년 11월 22일. 원이를 태운 중년 남자의 차가 떠나면서 1961년의 아이들이 쓰던 성당의 역사는 끝이 났다. 이후, 몇 년 동안 소돌 성당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낡은 담이 허물어지고 새 담이 세워졌으며, 담에 바짝 붙어 자라던 꽃나무들은 잘렸다. 남자 아이들의 기숙사로 사용되던 창고는 다시 창고가 되었고, 아이들이 쓰던 식당 역시 창고가 되었다. 그 사이 수많은 신부들이 오고 나갔다. 변하지 않는 건 묵묵히 밥을 해대는 어머니와 홀로 남은 나뿐이었다. 그리고 소돌 성당은 내가 부임하던 첫 해에 다시 고아원의 간판을 걸게 되었다.

*

처음 얘기했던 대로 꼭 보름을 채운 원이가 나의 방을 찾았다. 그가 말했다. 내일 새벽차로 떠날 거야, 인사는 지금 미리 해야 할 거 같아서. 나는 물었다. 봐야 한다는 건 보았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은 채 가만히 웃었다.

보름 내내, 나는 그를 주시했다. 하지만 수상한 거동은 전혀 없었다. 가끔 동네 산책을 하긴 했는데, 이 마을엔 더 이상 그를 아는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원이는 누구를 찾는 일도 없이 그저 성당의 아이들하고만 어울렸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는 여전하여 아이들은 곧잘 그를 따랐다.

더 할 말은 없고? 내가 다시 묻자 원이는 기다렸단 듯이 봉투를 내밀었다. 숙박비였다. 난 받지 않겠다고 했다. 원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른 봉투를 내밀었다. 기부금이라 했다. 이곳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으니, 내가 알아서 가장 필요한 곳에 써달라고 덧붙였다.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봉투를 받아들자, 원이는 고맙다고 하곤 악수를 청했다. 그것이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꼭 한 번 더 원이를 보았다. 단 몇 분이었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기록은 사실 이 몇 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날 새벽에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세상은 아직 깜깜하였다. 나는 갑자기 새벽바람이 몹시 쐬고 싶었다. 이유는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무엇에 홀린 듯 바깥에 나와 있었다. 영하의 날씨에 카디건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나는 예배당과 두 개의 창고를 지나 뒷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발걸음이 그 쪽으로 항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직 떠나지 않은 원이를 보았다.

원이는 예전에 꽃나무가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내 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한 듯했다. 짐 가방은 아무렇게나 땅에 버린 채,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보기 위해 돌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한때 가지 사이에 비친 하늘을 즐겨 그리던 원이는 15년 후 미국에서 가지 사이로 보이는 피사체를 주제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음 일들은 순풍을 탄 듯 그냥 진행되었다. 원이는 무수히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예술 경영에도 두각을 나타내어 그 방면으로 학위도 땄다. 그는 어디를 가나 주목을 받았고, 벼랑 근처에는 가 본 적도 없다. 세상의 광명은 그 많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원이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원이는 좋은 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의 두 배나 되는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다. 볼품없는 날개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했던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는 높이 날아갈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신문에서 처음 그에 대한 기사를 보았을 때, 그가 미국에 예술학교를 설립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가 처음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안다. 원이가 무엇을 보기 위해 돌아왔는지. 그 새벽 그의 눈앞에 있던 건 과거와 파국이었다. 날개를 접을 힘도 없이, 오래 전에 내게 얘기해 주었던 클레의 천사처럼, 원이는 자신의 앞에 폐허가 쌓여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우리의 날개가 다 자랄 때까지, 요한 신부가 살아주었더라면, 우리가 서로의 치부를 덮지 않고 단 한 번만이라도 붙잡아주었더라면,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는 것 이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제대로 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이 모든 질문이 다 원이가 바라보고 있던 과거의 다름이 아니다. 가장 좋은 패를 쥐고 있었던 그마저도 실은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날개는 찢기고 젖어 있었다. 방치된 채,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 나는 이 이야기를 꼭 남겨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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