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04)제주시 애월읍 광령1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104)제주시 애월읍 광령1리
모든 근심 사라진다는 냇가… '무수천 팔경' 아시나요
  • 입력 : 2016. 10.04(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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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과 농경지 경사를 따라 아름답게 펼쳐진 마을풍경(위)과 광령계곡 절벽에 우거진 숲(아래).

곳곳에 분포한 고인돌과 토기편 오래된 주거지 흔적
명리 탐하지 않고 권력 남용 등 경계한 삼불출 마을
돈사로 인한 악취 생활 불편… 중학교 신설은 숙원



선인들이 이르기를 광령은 산칠성(山七星), 물칠성(水七星)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였다. '산가수청(山佳水淸)하니 光이요, 백성의 민속이 밝고 선량하니 令이라.' 산이 아름답다 하여 큰수덕, 정연동산, 서절굴동산, 무녀모를, 엄지굴동산, 테우리동산, 높은모를이 모여 칠성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연, 거욱대물, 절물, 자중동물, 독지굴물, 행중이물, 셈이모를물 이렇게 샘물마저도 칠성형으로 이뤄져서 옛 대촌 광령리가 되었다고 한다. 속칭 '칠성동산'이라 부르는 이 일곱 개의 동산이 마치 알을 품은 듯 차례로 세 마을을 낳으니 바로 광령 1, 2, 3리이다. 광령의 중심 마을인 광령1리는 칠성동산 하단에 길게 누운 서낭동산을 병풍 삼고 무수천을 동쪽 어깨 삼아 설촌된 마을이다. 마을 북쪽 '너분절' 지경에 무수천 서쪽을 따라 고인돌 12기가 산포되어 있다. 지석묘 내부와 그 주변에서 탐라형성기(BC200~AD200)에 유행했던 적갈색토기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면 고대 탐라시대 규모가 큰 마을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섬 제주의 고인돌 중에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주변에 여러 개의 샘이 있어서 풍부한 용수 조건과 토양층이 깊어 농경에도 유리한 입지 조건을 지녀 주거지역으로 적합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탐라시대 초기 대규모 주거지였음을 보여주는 광령지석묘 1호.

이정웅(75) 노인회장이 전하는 설촌의 역사는 이렇다. "분묘 또는 고증이 가능한 역사적인 기록에는 6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설촌 당시부터 써왔다는 光令이라는 마을 이름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53년(효종4년)에 편찬된 탐라지가 최초입니다. 대촌을 이루는 한 마을이었다가 일제강점기에 1구와 2구로 구분되고 4·3 이후에 1리, 2리, 3리로 나누어졌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자부심은 민속이 선량하여 삼불출(三不出) 삼불입(三不入)의 마을이라 하였습니다. 관불출(官不出), 부불출(富不出), 권불출(權不出) 이 셋은 명리를 탐하지 아니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이웃과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마을공동체 차원의 신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불입은 악불입(惡不入), 적불입(賊不入), 병불입(兵不入)으로 마을 안에 포악한 자는 들어와 사는 것이 불가능 했으며, 도적이나 불량배가 사는 것도 없었고, 외침이나 민란이 발생해도 피해를 입는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외적인 사실은 4·3광풍에 107명이 죽는 피해를 입은 일입니다." 출세한 인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와가며 미풍양속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인생관들이 녹아 내려온 마을이다. 마을공동체의 규약이 살아 숨쉬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창보(88) 어르신을 향장으로 모시고 마을 운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 당이 있었다는 당동산은 마을 소공원이 되어 있다.

무수천 팔경을 빼면 광령1리의 절경을 느끼지 못한다. 비경을 보여주는 8개의 명소는 1경 보광천(보光川), 2경 응지석(鷹旨石), 3경 용안굴(龍眼窟), 4경 영구연(靈邱淵), 5경 청와옥(靑瓦屋), 6경 우선문(遇仙門), 7경 장소도(長沼道), 8경 천조암(泉照岩)이다. 해발고도가 비교적 낮아 주거지역 가까운 곳에 심산유곡의 운치를 맛볼 수 있는 이런 계곡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지은 이름이 더욱 멋있다. 無愁! 근심이 없는,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냇가라는 의미.

양태성 이장

양태성(63) 이장이 밝히는 숙원사업과 당면과제는 이렇다. "동서로 난 도로는 확장이 되어 있습니다만 정작 외도와 남북을 연결하는 도로는 자동차시대에 걸맞은 모습이 아닙니다. 광령1리 서쪽 지역 마을들은 대부분 남북으로 마을을 관통하는 길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외도와 연결된 대도로가 없는 것인지 마을 주민들은 불편함을 넘어서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주장합니다. 지금 외도로 내려가는 농로길 부근에 집들이 간혹 들어서는 경우가 있는데 도로확장 계획선이라도 행정적으로 미리 그어놔야 나중에 도로확장공사를 하는 비용이 절감되는 것 아닙니까? 광령천 서쪽을 따라 윗마을은 애월읍이고 아랫마을은 제주시에 속한 행정적으로 이상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시급하게 도로계획선이라도 그어 주민들의 분노를 진정시켜야 하겠습니다." 예산타령으로 세월을 보내는 행정당국에 너무도 예리한 지적을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주거지역 가까이 들어서는 무인텔 허가 문제' '1969년에 군유지로 편입시켜버린 당동산 일대를 소송을 통해 찾아오는 문제' 등 행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들이 수두룩하다. 오혜령(58) 부녀회장은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마을 안에 있는 돈사들 때문에 악취로 생활하기 불편합니다.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만 행정과 법에서는 모른 척 하는 것 같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미 마을은 도농복합 공간으로 탈바꿈 해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축산분뇨 문제를 주민의 생활권 차원에서 따지고 있었다.

280년 된 나무와 그 나무가 있는 올레가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느낌을 준다.

30년 뒤 광령1리의 모습을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급속하게 도시화될 것이라는 것. 마을의 위치가 이런 자신감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어딘가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지금 이정세를 내며 광령1리라는 마을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주민들이 '산칠성 물칠성' '삼불출 삼불입'의 자부심이 외부유입 인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나갈 것인가 하는 궁금증. 큰 건물이 많이 들어와서 도시처럼 보이는 것 보다 소중하게 키워나가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고영전(59) 개발위원장이 소원이 그것이다. "광령에 중학교가 생겨야 합니다." 생활과 밀접한 것에서부터 발전 방향을 잡아가고자 하는 의지였다. 광령1리는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이 있다. 그럴수록 더욱 체계적인 행정적 관심이 요구되는 마을이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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