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36)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36)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헌마공신 김만일 정신 바탕으로 '제주마 본향' 표방
  • 입력 : 2015. 04.14(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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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과 오름 곡선이 아름다운 마을목장 속 옷귀마테마타운(위)과 마을회관에서 바라본 넉시오름과 마을전경(아래).

4·3 당시 마을주민 250여명 희생…여느 마을처럼 아픔 간직한 곳
서중천 따라 펼쳐진 목초지에 김만일 가문 대대로 명마 키워
조선 조정에 1300여필 군마 헌납…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기도
"마을의 자랑 결속력 통해 관련 사업 펼쳐 중흥 전기 마련"



나지막한 넉시오름이 마을 가운데 자리한 옛 지명 옷귀. 남원읍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신흥2리, 서쪽은 한남리, 남쪽은 남원리와 태흥리, 북쪽으로는 수망리와 연결된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 서중면 시절엔 오일장이 열리던 면소재지였다. 풍수지리에서 일컬어지는 양택지와 음택지 구분을 보면 제주에 6대 양택지와 양택지 중 둘을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을이 의귀리다. 그만큼 지세가 신비로운 기운을 지니고 있어 옛 선인들이 탐낼만한 땅이었다는 것이다. 제주에서 보기 드물게 2개의 하천이 통과한다. 서중천과 의귀천. 건천이지만 선데기소, 박대기소, 창세미소등 지류에 소가 많다. 4·3 당시에 여느 중산간 마을처럼 토벌대에 의하여 불에 탄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의귀초등학교에 중대병력의 군인들이 주둔하며 전초기지로 사용하였다. 주민 250여 명이 희생된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왔다. 학살 당한 분들은 현재 현의합장묘에 안장되어 있다. 1949년부터 재건되기 시작했지만 동산가름과 웃물통, 장구못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했다고 한다. 복구될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지방기념물 제65호 헌마공신 김만일 묘역.

의귀리 마을 명칭의 연원을 제공하는 김만일 가문의 역사를 알아야 의귀리를 이해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관심은 무엇이 김만일 가문이 '말을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의귀리를 택하였는가?'하는 대목이다. 전해지지 않는 비결이 있었을 것이다. 흙붉은 오름에서 발원하여 태흥리 바다까지 이어지는 12.1Km 서중천을 따라가며 펼쳐진 목초지에 사람보다 말이 더 많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명마를 키워낼 수 있는 자연환경적 요인과 이를 용도에 맞게 조련하고, 순치시키는 기술력을 가졌으며 말이 병들거나 다치면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인지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축적된 지식이 없었다면 218년 동안 김만일 가문이 세습하여 산마감목관을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정에 1300필이 넘는 군마를 헌납하여 그 공으로 인조 6년(1628년)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어 헌마공신으로 길이 칭송되고 있는 김만일. 마을 이름 의귀(衣貴)는 '임금이 하사한 귀한 옷이 당도한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니 김만일가문의 우국충정을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마을회관 앞 하천은 독특하게 서쪽 서중천에서 동쪽 의귀천으로 흐른다.

문치주의 사대부 국가 조선이 변방 섬 제주의 목축업자에게 종1품 벼슬을 줘야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공맹의 도나 뇌까리던 자들이 글자 다루는 재주로 벼슬을 얻던 시대에 후손들까지 공신가문의 역할을 인정한 이유는 딱 하나다. 말 키우는 능력. 김만일 가문이 보유한 노하우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여 '딜' 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조선팔도에서 김만일 가문에서 키운 좋은 말들을 사기 위해 육지 상인들이 의귀리에 들어와 며칠을 숙식하며 거래를 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경제가 살아나 마을이 번창하기 시작하고 풍요를 누렸다는 이야기.

제주가 말산업특구로 지정되어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이러한 신화적인 상징인물을 역할모델로 제시하고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지 자못 궁금하다. 모방과 답습에 찌들어서 우리가 가진 자긍심을 가치의 중심이나 선두에 두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현실을 담는 그릇은 항상 정신이다. 김만일 정신을 바탕으로 제주마의 본향 의귀를 표방한 '옷귀마' 캐릭터를 마을 입구에 세우고 말을 관광자원으로 한 미래지향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오문식 이장

오문식(51) 이장이 밝히는 당면과제는 크게 보면 제주도정 현안이기도 했다. "김만일 기념관 건립과 생가 터 복원을 통하여 노블리스 오블리주 교육의 산실이며 말산업의 정신적 메카로 자리 잡도록 할 것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말 관련 사업들을 펼친다면 의귀리 중흥의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 단위 사업 하나로 바라보면 천 년이 가도 이뤄지지 않을 일이다. 도민 이익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실현 불가능한 행정당국의 숙제다.

놀랍게도 의귀리는 이 단위로 볼 때, 감귤과수원 면적이 제주에서 가장 넓은 곳이라고 한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좋아서 감귤 재배의 최적지라는 것이다. 경지면적 4115㎡의 대부분이 감귤과수원이라니. 필자가 탐방하는 중에도 멋있게 포장된 명품감귤들이 대량으로 택배트럭에 실려지고 있었다. 장명옥(45) 마을회 사무장이 설명하는 의귀리의 자랑은 마을 결속력이라고 했다. "어딘지 모르는 공동체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어요. 마을회관이 사랑방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전통적으로 인정이 많고, 성격이 온순하여 의논으로 결정하는 마을풍습이 아름다운 불문율처럼 지금도 흘러내는 곳.

김만일 정신을 바탕으로 제주마의 본향 의귀를 표방한 '옷귀마' 캐릭터.

오영복(50) 새마을 지도자가 80세가 되는 30년 뒤 의귀리는 마을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통적으로 마을목장으로 사용해온 100만 평에 달하는 목장지의 80% 정도가 도유지로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를 마을소유로 찾아오는 것. "그렇게 된다면 의귀리는 엄청난 규모의 관광특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인구 1만 명이 살아가는 그런 대규모 관광지." 자초지종이야 복잡하지만 의귀리 마을공동체가 관리운영하며 살아온 생존의 터전을 오직 행정적인 서류상의 근거를 가지고 도유지(당시 군유지)로 편입시켜버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는 의지 표현이다.

조선 최고의 말 육성 노하우를 지녔던 김만일가문의 목장이라는 역사성을 강조해주기 위해서라도 의귀마을 목장은 의귀리 마을공동체가 발전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행정이 앞장서서 도와야 한다. 말산업특구 속 특구가 의귀리다. 역사보다 큰 정신적 자산은 없다. 김만일가문의 역사는 도민 자산이기도 하다. 이 단위 마을 역사로 생각하기엔 의미와 가치가 너무 크기에 그렇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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