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영웅 문도깨비, 미완의 귀환

[김양훈의 한라시론] 영웅 문도깨비, 미완의 귀환
  • 입력 : 2018. 09.06(목) 00: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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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섬 곳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제주4·3의 지옥에서 많은 목숨을 구한 성산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은 홀로 우뚝 선 의인이었다. '문도깨비'로 불리던 기개(氣槪) 대장부, 그가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됐다. 경찰청은 영웅의 흉상을 제작해 오는 10월 셋째 주 제막식을 개최한다.

제주4·3의 무장봉기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나자 제주도 내 경찰서별로 '예비검속'이 시작되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포함해 과거 인민위원회 간부와 3·1사건 관련자, 그리고 4·3사건 관련 재판을 받았거나 수형 사실이 있는 소위 '좌익분자들'이 검속의 주요 대상이었다. 1950년 8월 30일, 성산포경찰서장이던 문형순은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보낸 한 장짜리 총살명령 공문을 받았다.

총살명령 공문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실시 후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 중에서 현재까지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방첩대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의뢰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본 문형순 서장은 공문 상단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 쓰고 대상자 76명에 대한 총살명령을 거부했다. 문형순 서장은 모슬포경찰서장을 지내던 1948년 말 '초토화 작전'의 학살극 상황에서도 '자수사건'에 휘말린 많은 모슬포 주민을 살린 적이 있었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살신성인이었다.

평안남도 안주 태생인 문형순은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만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단체이며 준 자치정부 '국민부'의 중앙호위대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기도 하였다. 국민부는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일제 앞잡이 제거와 군자금 모집, 독립군 모병을 위한 군사활동을 벌였다. 해방이 되자 단신으로 월남한 그는,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경찰에 발을 들여놓은 후 제주로 내려왔다.

문형순 서장은 1950년대 말 성산포경찰서장에서 물러난 후 함안경찰서장을 1년 동안 지내고 다시 제주에 내려와 경찰 근무를 하다 1953년 9월 15일 퇴직하였다. 경찰을 그만두고서 제주시 무근성에서 쌀장사를 하기도 했으며, 말년에 그는 코리아극장의 전신인 현대극장 입구에서 기도를 서는 잡일을 하다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향년 70세였다. 피붙이 하나 없고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였다. 그는 혼란을 틈타 온갖 악행으로 재물을 갈취했던 '서청' 사람들 하고는 차원이 다른 영웅적 삶을 살았다.

2006년 8월 전정택 제주지구 평안도민회장이 문형순 서장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으나, '입증자료 미비와 사후행적 불분명'으로 보류됐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에 2010년 4월 추가자료를 찾아내 재심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011년 3월에는 이대수 전 제주보훈처장이 추가로 발굴한 자료를 보내며 다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으나, '지금까지의 자료로는 더 이상의 재심사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안타까운 일이다.

젊은 날 '문형순'의 독립운동 흔적은 저 멀리 만주벌판에 남겨져 있다. 월남 이후 제주에서 경찰업무를 수행했던 혈혈단신의 영웅은 재물욕 없는 청렴 공복의 삶을 살았다.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할 심사자료가 미흡하다면, 이제는 국가보훈처가 나서서 그가 분투했던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해줘야 한다. 살아남은 후손들의 의무이며, 영웅에 대한 국가의 도리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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