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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11)'나비박사'석주명
연구로 불태운 짧은 생애… 제주에 남긴 발자국 선명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입력 : 2016. 08.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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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토평동 사거리 석주명 기념 공원. 강경민기자

송도고보 교사 시절 나비 연구…일찍이 세계적 학자 반열 올라
제주서 인문·사회 등에 눈길…'제주학 선구자'로 평가 받아
최근 석주명 기념관 건립 윤곽…서귀포시 기본 계획 수립 추진

2년 1개월, '나비 박사' 석주명(1908~1950·사진)이 제주에 머문 시간이다. 시간이 주는 무게는 크지 않지만 그가 제주에 남긴 발자국은 선명하다. 제주에서는 석주명을 기리는 작업이 물살을 탔다. '석주명 기념관' 건립이 윤곽을 드러내면서다. 그동안 잊힌 석주명과 그의 업적을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육지에선 거의 잊혔습니다. 제주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10~20년이 지나 단절되고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석주명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인 남상호 대전대학교 석좌 교수가 말했다. 그의 말은 삶의 끝과 함께 묻힐 수밖에 없던 석주명의 삶을 다시금 들추게 했다.

한반도 최남단 마라도까지 누볐던 석주명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육필 원고와 '제주도문헌집'(1949).

▶세계적 학자가 된 석주명= 삶은 짧았다.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한국전쟁 중에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마흔 두 살이었다. 그러나 석주명이 남긴 기록의 울림은 컸다. 20년의 연구 생활에 유고집 8권, 학술논문 128편, 기고문 180여 편을 남겼다.

'나비 박사'의 시작은 우연찮았다. 1926년 송도고보를 마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게 계기가 됐다. 석주명은 낙농 지식을 배우기 위해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진학했지만 관심은 농생물학으로 옮겨갔다.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1875~1955) 교수의 지도로 나비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석주명의 나비 연구가 절정을 이룬 건 1931년 모교인 송도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때였다. 작가 이병철은 저서 '열정의 나비 박사 석주명'에 "1931년부터 1942년까지 11년에 걸친 송도고보 교사 시절을 그는 자기 인생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그가 일생 동안 발표한 논문 128편 중 3분의 2가 넘는 79편을 이 때 발표했고, 세계적인 학자로 올라섰다"고 썼다.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도 이때 발간됐다. 여기에서 석주명은 조선산 나비를 255종으로 정리했다. 조선 나비가 921종에 달한다는 외국 학자의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세계에 30여명 밖에 안 되는 세계나비학회 회원이 됐고, 당시 펴낸 책은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됐다. 조선시대만 해도 노랑나비, 흰나비, 범나비 정도로만 불렸던 우리나라 나비가 시골처녀나비, 산제비나비 등의 이름을 갖게 된 뒤에도 석주명이 있었다.

▶나비가 맺어준 제주와의 인연= 그가 제주와 연을 맺은 것도 나비 때문이었다. 1942년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송도고보를 그만 두고 경성제국대학 부설 생약연구소에 들어간 뒤, 이듬해 제주도에 시험장이 생기자 자리를 옮겼다. 당시 시험장이었던 곳은 현재 서귀포시 토평동에 있는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다.

석주명이 채집한 제주꼬마팔랑나비 표본 나비를 채집할 때 썼던 장갑과 배낭 등 유품

제주에서 그의 관심은 나비에 그치지 않았다. 1936년 여름 한 달간 제주에서 나비 채집을 하며 육지와 다른 제주의 언어,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터였다. 석주명의 연구 범위는 제주 인구, 문헌, 사투리, 곤충, 민속을 넘나들었다. 2년 여 간의 제주 생활로 '제주도 방언집'(1947), '제주도 문헌집'(1949) 등 총 6권의 제주도 총서를 펴냈다.

특히 제주도 방언집은 우리나라 사람이 펴낸 최초의 방언집으로 국어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제주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스로도 '반제주인'이라 할 만큼 제주에 대한 애정도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업적에도 그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1964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추대 받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세계적인 학자의 명성이 소리 없이 사라질 위기였다. 남상호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석주명 선생은 고집이 세고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과의 융화가 단절된 면이 있었다"며 "그런 점이 장점이 돼 40여년의 짧은 생에 큰 업적을 남겼지만 학문적 업적은 단절됐다"고 했다.

남 교수는 이어 "해방 이후에 외국에 분자생물학이나 첨단 생물학 등이 태동하면서 젊은 학자들 사이에선 석주명 선생이 해왔던 박물학적인 학문은 고루한 것으로 여겨졌고, 신학문을 해야 제대로 평가 받았다"며 "석주명 선생은 대학에서 정규 인력으로 연구를 하거나 제자를 키운 적도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 갔다"고 설명했다.

석주명이 근무했던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시험장의 모습을 일부분 유지하고 있는 토평동의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

▶잊혔던 삶, 다시 조명되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석주명은 서서히 조명 받기 시작했다. 탄생 100주년이 된 해인 2009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기리는 움직임은 미미했다. 제주에선 2003년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 인근에 기념비가 건립되고, 2006년 석주명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회가 열렸지만 이후 과정은 더디기만 했다.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가 2011년 펴낸 '석주명기념사업 활성화방안 수립조사 보고서'에서 방향성이 제시된 석주명 기념관, 나비공원 조성 사업도 지지부진해 왔다.

뒤늦게나마 지난해 '석주명 기념관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건립 부지 마련 등이 속도를 내고 있다. 서귀포시는 석주명이 연구했던 제주대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의 건물과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최근 제주대와 교환할 토지를 확보하고 협의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서귀포시는 이 절차가 마무리되면 농림축산식품부의 '영천동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과 연계해 석주명 기념관을 조성할 예정이다. 서귀포시 관계자는 "석주명을 테마로 영천동, 토평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기본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고 했다.

남 교수는 이에 대해 "석주명 선생의 생애에서 제주도민을 위한 흔적이나 헌신이 자라나는 청소년에겐 교육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며 "석주명 선생이 나비 연구를 주로 했기 때문에 나비생태공원을 함께 조성한다면 자연 경관 훼손이 문제되는 요즘, 서귀포시가 문화의 도시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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