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파과
사라지지 않는
  • 입력 : 2025. 06.02(월) 03: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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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과'

[한라일보] 한 사람이 있다. 긴 세월을 겪은. 외로움이 고통과 맞물렸을 때 누군가의 손길이 기적처럼 그를 구했고 자신을 구한 손이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쓰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자신 또한 누군가를 죽인 후 였다. 어리고 여린 날 ‘손톱’ 끝에 묻었던 피는 단단히 굳어져 노년의 ‘조각’이 되었다. 조각 같은 사람, 무르지 않고 단단하며 피와 살이 아닌 조각난 생의 단면들로 완성된

외로운 형상이여.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민규동 감독의 영화 ‘파과’는 노년의 킬러 ‘조각’의 이야기다. 굳은 살처럼 달라붙어 뜯어내지 않고는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사는 그녀는 더 이상 지킬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며 살아 왔기에 죽음이 낯설 리는 없지만 노화는 익숙하지 않다. 몸의 구석구석은 말을 듣지 않고 실패처럼 느껴지는 실수 또한 하게 된다. 왕년의 전설은 그렇게 낡아간다. 쓰임에 맞춰 살아 왔지만 쓸모를 고민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파과’는 외로운 누군가에게 타인의 선의가 얼마나 깊게 파고 드는지 그래서 그 속살을 얼마나 빨리 무르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고독의 표피를 뚫고 들어온 것은 끝내 누군가의 안에 자리를 잡는다. 무색과 무취였던 그곳에서는 달큰한 내음이 풍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모른다. 단내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상하기 시작된다. 변색되고 변질되며 예상할 수 없는 지독한 체취로 급변한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이제 없다.

‘파과’의 ‘조각’이 가진 외로움의 표피를 뚫고 들어온 친절한 강선생과 갈 곳 없는 개 ‘무용’은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던 그녀에게 다시금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다. 다친 나를 치료해줬던 이와 다친 개와 함께 보낸 시간들은 재생의 효용이 무엇인지를 그녀에게 알려준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구원의 감각이 다시금 생기로 피어난다. 그렇게 삶의 생기가 ‘조각’ 위로 번질 때 ‘투우’가 찾아온다. 킬러 ‘투우’는 ‘조각’을 맹렬하게 파고드는 또 다른 타인이다. ‘투우’가 가진 집념은 섬찟할 정도의 한기를 품고 있는데 그 맹렬함의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도대체의 물음표가 지속되던 중 ‘파과’가 꺼내 보이는 ‘투우’의 속살은 ‘조각’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이 침투한 기억이 남긴 격렬한 흔적, ‘투우’는 그것을 이정표 삼아 ‘조각’에게 돌진해 왔다는 것.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나를 살린 것은 나를 어떻게 만드는가, 나를 살게 했던 기억은, 그 기억을 건네 준 타인은, 영원하지 않은 한때는 나를 어떤 사람은 조각하는가.

‘파과’는 킬러들의 격렬한 싸움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액션 장르물 이지만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불시착한 마음들의 지독한 멜러 드라마에 다름 아니다. 죽음은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다고 믿던 이들에게 사랑은 계획에 없던 재난이라는 것, 마음의 동요 없이 수행하는 작업의 끝에 결국 남는 것은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마음 한 조각이라는 것이 이 비극을 진동하게 만든다. ‘조각’과 ‘투우’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들로 살아 남은 이들이다. 몸에 새겨진 칼의 흔적들에 무감해진 킬러들에게도 마음을 할퀴고 간 타인의 자국들은 결코 희미해지지 않음을 관객들이 그들보다 먼저 알아 차릴 때 ‘파과’는 선명한 단내를 흩뿌린다. 흠집이 난 과일, 달게 익어 무르고 상하기 시작한 시기, 그러니까 당도의 끝에 스며드는 비릿함과 쌉쌀함이 만들어 내는 것은 취기에 가까운 혼미한 기억들의 요동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사랑 받았을 때가 일치하지 않았음이 허공 중에 소용돌이 친다. 사랑의 시차가 만들어낸 공격과 수비가 무용해진다. 이 싸움의 끝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모두가 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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