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하이파이브
서로가 될게
  • 입력 : 2025. 06.09(월) 02: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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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이파이브'

[한라일보] 대학 입시 실기 시험장에서 받은 주제는 '가장 강력한 힘'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한정된 시간이 주어진 입시장이라 깊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날카롭게 깎아온 연필을 백지에 대고 무슨 생각이든 떠올리려 했지만 시험이라는 압박감 때문인지 아이디어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에는 분주하게 스케치를 하는 사람들, 이미 물통에 물을 떠와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보였다. 초초한 마음 위로 불현듯 떠오른 건 언젠가 엄마가 들려줬던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내가 너무 아팠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급한 마음에 나를 업고 한참을 뛰었다는 이야기. 땀을 줄줄 흘리며 뛰고 있는데 뒤에 업힌 내가 꺄르륵 웃어서 결국 마주 보고 웃었다는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밑그림 삼아 시험을 치뤘다. 아기를 안고 대륙을 건너는 엄마의 모습을 그리다가 찔끔거리며 울었던 것도 같다. 눈물을 머금고 그렸지만 그림에는 활력이 넘쳤다. 대륙 사이에 놓인 바다를 훌쩍 건너는 용기의 현현 그리고 그 용기의 품에 안겨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광활한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이. 능력을 넘어서는 일, 한계를 벗어나는 일, 범상한 일상을 번개처럼 쪼개는 기적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고 믿는다.

강형철 감독의 [하이파이브]는 의문의 장기 기증자로부터 각기 다른 장기를 이식 받은 뒤 초능력이 생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절체절명의 신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웠을 그들은 장기 이식 후 예상치 못한 초능력을 덤으로 얻지만 이를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위해 써야 할 지는 당장 알 수가 없다. 놀라운 힘은 일상에서 쉬이 드러낼 수 없고 강력한 변화는 오히려 몸을 사리게 만든다. 맘 놓고 자랑할 수도 또 사용할 수도 없는 이 초능력들은 어쩐지 좀 이상하다. 몸에 생긴 새로운 표식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은 운명적인 한 팀이 된다. 그들이 한 팀이 되는 이유는 바로 '초능력자에게는 외로움이 친구'이기 때문이다. 수술 전에도 신체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외로웠을 이들에게 초능력은 일순간 영웅으로 변신하는 마법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외로움을 겪고 있는 친구를 알아보게 하는 소수자들의 암구호에 가깝다. 그러니까 새 친구의 이름이 나와 같은 '외로움'이었던 것. 내가 당신의 외로움을 모르지 않는다고, 당신이 나의 외로움을 알아볼 수 있다고. 그렇게 그들에게 주어진 초능력은 서로의 사이에서 드디어 진동하고 율동한다. 외로운 우리가 친구가 되는 일, 낯선 초능력이 씩씩한 동력을 얻어 진짜 힘이 되는 제 1의 조건이 거기에 있었다

[하이파이브]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팀이 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힘의 효용을 체감한다. 강형철 감독의 장기라 할 만한 리드미컬한 앙상블을 통해 초능력의 시너지가 입체적으로 펼쳐지는데 이는 특히 영화 초중반의 에너지를 최대치로 출력하는 '카트 체이싱'씬에서 빛을 발한다. 액션 장르물의 카 체이싱을 솜씨 좋게 비튼 야쿠르트 카트의 도심 질주는 초능력자 캐릭터들의 좌충우돌로 시작해 각각의 힘을 적재적소에 선보이는 스테이지로 전회되며 올드 팝의 무드를 벗삼아 달리는 레트로한 드라이브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 잡는다. 또한 위험천만한 질주가 이어짐에도 안심하고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장르의 경쾌한 매력은 이 우정의 끝을 낙관하게 만드는 장르적 장치가 된다.

[하이파이브]는 슈퍼히어로 무비의 한국적 변형이라는 측면을 기세 좋게 밀어 붙이는 영화다. 누군가의 외로움을 파고드는 기운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결과로 제시되는 영화의 권선징악 형 서사는 관객들을 기꺼이 선의를 택한 서툰 영웅들의 편에 서게 만들고 어떤 능력도 이식 받지 못했지만 아픈 딸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초능력 마저 초월하는 아빠라는 존재는 '울컥' 이라는 특수효과로 불신의 허들을 기꺼이 뛰어 넘게 만든다.

단 한 사람이 온전히 누군가를 믿어줄 때 그 믿음은 누군가의 완전한 세상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에게 초능력은 재채기처럼 올 지도 모른다. 나를 간지럽힌 당신의 다정이 나의 구원이 되었다는 걸 영원히 당신이 모른다 해도 나는 당신의 뒤를 떠받칠 준비로 무적으로 남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의 편이 되자. 편 먹고 편 가르지 말고 그저 서로가 되자. 힘이 되고 팀이 되자.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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