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해피엔드] 우리는 천천히 어긋나서

[영화觀/ 해피엔드] 우리는 천천히 어긋나서
  • 입력 : 2025. 05.19(월) 21:4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해피엔드'

[한라일보] 미동이 느껴진다. 우리가 어느 틈에 멀어졌다는 것을 알고 난 후다. 우리 사이의 틈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심장 박동만 거세게 쿵쿵 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의 너에게 지금의 나는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우리를 세차게 흔들었던 것이 정말 무엇이었냐고 너의 어깨를 흔들며 문책하게 될까, 아니면 너무 달라졌지만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너의 먼 발치에 우두커니 서서 과거의 나를 자책하게 될까.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희망일까 절망일까.

네오 소라 감독의 영화 '해피엔드'는 근미래의 도쿄를 배경으로 삼는다. 거기에는 음악에 푹 빠진 두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가 있다. 둘은 친한 친구들과 함께 만든 음악 동아리를 아지트 삼아 밤을 지새우고 몰래 숨어든 클럽에서 음악에 취해 몸과 마음을 흔드는 젊은이들이다. 어느 날 그들이 다니는 학교 교장 선생님의 노란색 자동차에 장난인지 테러인지 모를 일이 벌어진다. 범인은 쉽사리 잡히지 않고 학교는 학생들에게 AI 감시를 시작한다. 이 자유와 소란의 날들 아래에서 불현듯 땅이 흔들린다. 지진 경보는 불규칙적이지만 집요하게 이들을 순간들을 에워싸고 끝이 없을 것처럼 서로에게 서로였던 이들의 관계에도 미세한 진동과 확실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해피엔드'를 그저 흔들리는 청춘의 방황을 묘사한 작품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수많은 청춘 영화들이 어딘가 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순간에 매혹되고 기꺼이 방향을 잃거나 혹은 우연하게 찾는 방식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열도의 지진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위에 놓인 이들의 필연적인 기울기를 관찰하며 움직인다. 재난이 기본값인 상태, 그런데 이 진동의 판 위에서도 음악에 취해 스스로 흔들리는 것을 택한 유타와 코우를 세차게 뒤흔드는 것은 강도를 높여가는 지진이 아니다. 불안과 공포 위에서도 시간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채색하는 편을 택한 이들에게 찾아오는 균열은 소음과 청음이 멈춘 침묵과 정지의 순간들로 부터다. 나와 닮은 너, 너를 닮은 나 그래서 우리였던 둘에게 찾아온 삶의 진동은 각자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들을 상대에게 향하게 한다. 옷에 붙어있던 먼지 같은 작은 삶의 조각들이 짐작하지 못했던 무게로 서로를 향한다. 그리고 기어이 날아갈 것처럼 뛰던 지금의 어깨를 뻐근한 감각으로 누르고야 만다. 부대끼며 엉켜 있을 땐 느낄 수 없었던 각질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밟는 대로 흐르던 시간이 멈추어 서고 너의 등을 보게 되는 순간과 맞닥뜨린다. 같은 곳을 보며 걷던 너의 어깨가 저 멀리 앞에 있고 돌아봐 주기를 기대하는 나의 눈동자가 맥없이 진동한다. 너와 나는 다른 선 위에 있다. 이제는 같은 음으로 진동할 수 없다.



'해피엔드'는 재난 위에서도 굳건했던 두 친구가 계급과 차별, 혐오라는 시대의 공기를 맞닥뜨리며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영화다. 우정이라는 세계를 만나 더없이 분주했던 청춘의 소동극이 선사하는 다정한 위로와 함께 예정된 이별을 향해 어긋난 채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관계의 파국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서늘한 감각이 공존한다. 단 한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그렇다고 그것이 마침표일리도 없는 영원한 물음표를 남기며 영화는 두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기어코 솟아 있어 오르고 내리던 육교 위에서 유타와 코우가 또 한 번의 이별을 겪을 때 카메라는 둘의 관계를 유예 시키고 싶은 마음을 내비치는 것 같았다. 잡았던 손이 떨어질 때의 감각을 기억하기에 [해피엔드]는 우리가 악수로 약속했던 미래가, 포옹으로 껴안았던 과거가 금이 간 채로도 깨어지지 않을 아문 현재임을 말하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방향이 달라도 너의 속도를 알기에 우리가 다시 스칠 것을 이제는 안다. 알게 되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30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