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진다"… 선흘 그림할망들이 '애순'에 전하는 위로

"다시 살아진다"… 선흘 그림할망들이 '애순'에 전하는 위로
예술공간 된 옛 농협창고
레지던시 선흘그림작업장
'폭싹 속았수다' 주제 전시
9명 할머니 참여해 작업
"그리면 해 가는 줄 몰라"
  • 입력 : 2025. 05.11(일) 16:19  수정 : 2025. 05. 12(월) 21:45
  • 박소정기자 cosoro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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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에 있는 \'선흘그림작업장\'의 모습. 별칭이 붙여진 할머니들의 작업공간이 그림으로 알록달록하다. 박소정기자

[한라일보] "애순아, 울지마라. 복이 돌아와 다시 살아진다."

그림을 그리는 고순자(87) 할머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 '애순'에게 이같이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애순과 그의 꿈 속에 나타나 딸 애순을 안쓰러워하는 엄마 '광례'의 장면을 담은 그림 아래에 이같이 글귀를 새겼다.

4·3 이후의 삶을 무지개 바람으로 형상화 한 그림 '어멍 목소리 귀에 장장 들려'를 그리면서 '무지개 할망(할머니의 제주어)'으로 불리는 그는 이 그림에도 무지개를 그려넣었다. 할머니가 그린 무지개는 작품마다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움이자 위로이자 희망을 전하기도 한다. 할머니는 "(그 장면을 보고) 마음이 막(엄청) 아팠어"라며 "비가 개면 무지개가 뜨고 이제 곧 날이 번쩍하게 좋아져 벳(햇빛)이 쨍쨍 비추는데, 애순이에게도 그 기운이 전해졌으면 했어"라고 했다.

'무지개 할망' 고순자 할머니의 작업실.

'무지개 할망' 고순자 할머니가 작업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난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에 있는 '선흘그림작업장'에는 할머니의 그림처럼 제주 배경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주제로 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선흘 그림할망들이 선보이는 전시 '폭싹 속았수다, 똘도 어멍도 할망도'다.

전시공간인 선흘그림작업장은 마을주민들이 옛 농협창고를 개조해 만든 예술공간이자 최근 선흘 그림할망들을 위한 갤러리·레지던시 공간으로 새롭게 꾸며진 곳이다. 선흘마을에는 11명의 그림할망이 있는데, 이 중 9명의 할머니가 이번 첫번째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해 이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초록할망 홍태옥, 고목낭할망 김인자, 소막할망 강희선, 무지개 할망 고순자, 신나는할망 오가자, 우라차차할망 조수용, 우영팟할망 김옥순, 무화과할망 박인수, 불할망 허계생 등 9명의 할머니가 참여작가다. 2021~2022년 붓을 처음 든 이들의 평균 연령은 87세다.

초록할망 홍태옥 할머니가 그린 양배추 그림.

우라차차할망 조수용 할머니의 작업실.

할머니들은 매일같이 이 공간으로 나와 그림을 그린다. 이에 '초록', '고목낭', '소막', '무지개', '신나는', '우라차차', '우영팟', '무화과', '불할망' 등 별칭이 붙여진 각자의 작업공간은 알록달록해지고 있다. 제주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자라온 요망진 소녀 '애순'과 무쇠처럼 우직한 소년 '관식'의 인생을 그린 '폭싹 속았수다'를 본 할머니들은 각자의 삶과 기억을 담아 드라마 장면들을 회화와 글로 표현해낸다.

드라마 속 주인공인 손을 잡은 애순과 관식의 머리 위에 해바라기 꽃이 피기도 하고, 밭일을 하며 다섯형제를 키운 자신을 떠올리며 양배추 밭을 그려보기도 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해녀 광례를 보며 물질할 때 쓰는 테왁과 전복을 가져와 직접 빗대어 대형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만해도 100점이 넘는다. 할머니들은 "여기서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 해가 가는 줄 모른다"며 미소를 짓었다.

소막할망 강희선 할머니가 그린 그림.

전시공간인 선흘그림작업장은 마을주민들이 옛 농협창고를 개조해 만든 예술공간이다.

이들의 '그림선생'인 최소연 작가는 "농부에서 화가가 되어버린 할머니들이 자신의 색깔에 따라 그려내는 그림의 세계관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시"라며 "단순한 그림 전시를 넘어, 공동체 기반 예술의 실천이 어떻게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할머니들의 작업실을 개방하는 '열린 스튜디오' 형식으로 운영되는 전시는 오는 6월 29일까지 이어진다. 관람은 매주 금·토·일요일(오전 10시~오후 5시)만 가능하다. 매주 신작이 발표·판매된다. 전시 기간 중에는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의 선흘포럼을 비롯해 관람객이 할망 작가들과 직접 교류하거나 창작 체험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자세한 사항은 소셜뮤지엄 누리집(www.socialmuseum.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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