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깊은 수면 아래 숨죽인 물결처럼, 출발선에 선 아이들은 잠시 망설인다. 세상은 아직 낯선 물살이고, 첫발을 내딛는 일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오늘도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그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두려움의 시간을 함께 건너자며 건넨 마음의 통로다. 교육은 단순한 기능의 향상을 넘어, 존재의 존엄과 영혼의 떨림을 온전히 품어내는 일이다.
물은 말이 없지만 쉼 없이 흐르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제 삶의 박자를 익힌다. 어떤 아이는 물속에 들어서기를 주저하고, 어떤 아이는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흐름을 따른다. 교사의 역할이란 그 물가에 먼저 발을 담그고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손짓에 가깝다. 그러다 언젠가, 한 아이가 조용히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순간 그 안에서 우리는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빛을 본다.
그러나 모든 아이가 곧장 앞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주춤하며, 멈추거나 돌아서기도 하고, 다다른 끝에서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성취보다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기다림이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곁을 내어주는 일이자, 기다림이라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다.
오늘의 교육 현장은 보이지 않는 틈 위에 놓여 있다. 교사와 학부모가 바라는 방향은 같아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서로 다른 경험과 기대가 스며 있다. 교사는 아이의 잠재력을 키워 내려 애쓰고, 학부모는 저마다의 마음으로 아이의 미래를 꿈꾼다. 애틋한 두 마음은 때로는 작은 오해와 엇갈림을 낳기도 하고, 진심조차 충분히 전해지지 못해 교육의 자리를 흔들리게 하기도 한다.
발달 심리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는 신뢰 속에서 관계가 맺어질 때 비로소 건강한 성장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의 정체성이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고 했다. 그래서 교육에는 무엇보다 '신뢰의 언어'가 필요하다.
역지사지의 태도와 감성지능(EQ)은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틈새를 메우는 연결 고리가 된다. 교육과 가정의 장이 협력적 연대를 이루려면, 공감과 이해를 중심에 둔 소통과 교사-학부모 간 신뢰 형성을 위한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아이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고유한 성장 경로를 걸어가도록 돕는 것은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나아가야 할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포용적 교육'과 '권리 기반 교육'이 더해질 때 교육은 비로소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따뜻한 공동체로 완성된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만의 계절로 성장한다. 중요한 건 그 흐름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용기다. 아직 출발하지 못한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하는 어른들. 그사이에 놓인 길 하나, 우리는 그것을 '기다림'이라 부른다. 그리고 교육은 그 길 위의 다리를 건너는,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사랑이다. <양복만 제주영지학교장·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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