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안에 있는 모든 것

[영화觀] 안에 있는 모든 것
  • 입력 : 2023. 09.15(금) 00:00
  •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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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잠'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 '잠'은 1음절의 단어인 제목 안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영화다. 어느 단란한 부부의 삶 안으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들어온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바뀌어 버린다. 출산을 앞둔 아내 수진은 대기업 인사 팀장이고 남편 현수는 무명의 배우다. 하지만 경제력의 차이는 둘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은 함께 살 집이 있고 함께 키우는 사랑스러운 개 후추가 있는 데다 매일의 음식과 일상과 마음을 나눌 작지만 행복한 여유가 있다. 이 둘 사이에 침범한 것은 남편 현수의 몽유병이다. 이유도 알 수 없고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병도 아니다. 몽유병 상태의 현수는 더 이상 수진이 알고 있던 현수가 아니다. 그러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누워 하루의 피로와 고단함을 잠재우는 그 시간이 이 부부에게 공포의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가 매일 밤 불청객으로 변하는 이 공포는 귀신보다 살인마보다 더 무섭다.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것.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상이 사실은 전혀 모르던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을 그래서 믿고 있던 이를 이제는 경계해야 하고 우리가 함께 알고 있던 것들을 상실해야 한다는 것.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이 걸린 수진과 현수의 집은 그때부터 이 공포와 맞서는 캠프가 된다. 그리고 출산을 앞둔 아내 수진은 이 캠프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로 변해간다. 모든 불온한 것들을 태워버려서라도 평온을 찾기 위해 수진의 고군분투가 영화 내내 이어진다. '잠'은 드라마틱한 온도 차를 보여주는 영화다. 부부 사이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온기, 통제할 수 없는 한 사람의 기행으로 서리는 냉기, 우리 안의 모든 것을 지켜내겠다는 이가 내뿜는 열기와 관객이 예측하지 못한 지점으로 달려가는 후반부의 오싹한 한기까지 영화는 90분의 러닝 타임 동안 온탕과 냉탕, 열탕을 쉼 없이 오간다.

 '잠'은 서스펜스 스릴러로도 가족 호러로도 볼 수 있는 복합장르물인 동시에 일상의 균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관찰 일지이기도 하다. 모든 부부 관계는 영원히 상대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 사랑의 서약 앞에서 큰 소리로 미래를 긍정한 뒤 시작된다.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내 앞의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맹세가 얼마나 거대한 약속인지를 '잠'은 실감나게 보여준다. 수진과 현수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러니까 자의와 상관없이 깨어져버린 균열을 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다. 허물어지는 신뢰의 벽을 등으로 지탱하고 누수처럼 번지는 불안의 감정들을 온 힘을 다해 닦아가며 이 불행을 소거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게 했던 안에 있는 모든 것, 나와 당신의 안에 그리고 우리가 만든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둘은 차라리 껍데기를 바꾸는 쪽을 선택하는 인물들이다.

 신인 유재선 감독과 베테랑 배우 정유미, 이선균은 새집에 셀프 인테리어를 하듯 영화의 곳곳을 정성스레 채워 넣는다. 아파트라는 좁은 공간을 십분 활용한 감각적인 촬영과 조명, 장르물로서의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음악과 음향을 비롯 영화 '잠'의 세간들은 정확한 위치에서 적절한 긴장을 만들어내고 유재선 감독은 명료하지만 풍성한 이야기라는 토대 위에 이 배치를 세밀하게 조율해 낸다. 불은 품은 정유미의 열연과 물처럼 극에 스며드는 이선균의 조화 또한 매력적이다. 10분마다 다른 얼굴로 관객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정유미가 스크린에서 관객을 잡아당기는 롤이라면 이선균은 비기를 숨긴 서포터처럼 화면의 모서리에서 능수능란하게 극의 리듬을 조율하다가 짜릿한 엔딩을 선사한다. '잠'은 한국 공포 영화라는 익숙한 장르 안에서 탄생한 반갑게 낯설고 놀랍게 매혹적인 영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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