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건배사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청바지'가 아닐까. '청춘은 바로 지금'의 줄임말인 '청바지'를 외치며 술잔을 부딪히는 이들에게서는 포말의 생기가 아지랑이처럼 스쳐간다. 가둘 수 없어서 아름답던 시간을 우리는 청춘이라 호명하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속절없이 시절에 소환 당하곤 한다. 그때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건, 얼마나 다른 곳에 있건 괘념치 않는다. 분명히 나의 것이어서 몸이 먼저 기억하고 마음이 재빨리 따라 잡는 것, 청춘. 봄이라는 계절은 다시 눈 앞으로 돌아오지만 청춘의 시간은 그렇지 않기에 감각은 기억 안에서 더욱 선명해 지곤 한다. 청춘은 결코 나이 듦의 반대말일 리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날, 모두의 생을 관통하는 단어가 아닐 리 없다.
지난 6월 1일 정재은 감독의 2005년 작품인 [태풍태양]이 개봉 20주년을 기념한 상영회를 열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이 상영회는 필름 상영으로 진행되었고 극장 안에는 20년 전 영화를 스크린으로 봤던 관객들과 처음으로 작품을 접하는 관객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인라인 스케이터들의 청춘을 다룬 영화 [태풍태양]은 왜 인지도 모르고 빠져들었던 젊음의 소용돌이에 대한 영화다. 고등학생 소요(천정명)는 공원에서 홀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가 놀라운 실력을 지닌 모기(김강우)를 만나게 되고 마치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매혹에 사로 잡힌다. 모기의 친구들인 한주(조이진), 갑바(이천희)가 있는 인라인 스케이트팀에 합류하게 된 소요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몸 안의 피가 돌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소요에게 찾아온 태풍 같은 시간들은 그를 어디로 데려갈까, 그가 신은 범상치 않은 바퀴 달린 신발은 그의 세계를 어디까지 넓힐 수 있을까.
인라인 스케이트는 20년 전에도 지금도 소수만이 즐기는 익스트림 스포츠다. 위험성을 떠나서 그 행위를 즐길 수 있는 공간 자체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도심 곳곳에 출몰해 빈 도로와 건물의 틈, 기물의 부분 등을 이용해 갖은 묘기를 선보이는 인라인 스케이트는 기예에 가깝다.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며 누가 보아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는 측면에서드 '그들만의 리그'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비행 청소년들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리로도 보이기에 이들은 종종 내쫓기곤 한다. 맘 놓고 갈 곳이 없음에도 이들은 다시 어딘가로 모여들고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자신들의 속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속절 없이 빠져들었던 젊은 날의 모든 것에 이유를 붙이기 시작한다면 그것 만큼 재미 없는 일이 있을까. 영화 속에는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한주의 질문이 있고 모기는 '야! 넌 사랑을 생각하니?"라고 대답한다. 누군가의 삶의 어디쯤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랑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에게는 인라인 스케이트가 그 사랑의 대상이다.
극 중 소요는 뒤늦게 사랑에 질문하기 시작하는 이다. 그는 자주 실패하고 때론 다치고 가끔은 행복하지만 갑자기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모두 인라인 스케이트라는 세계 속에 들어온 뒤 느끼는 감정이다. 그는 모기에게 묻는다. '우리가 좋아하는 건 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남기냐'고. 흔적이 남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계절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태양 볕이 남긴 벌겋게 달아 올랐던 충만한 뜨거움이 화상으로 남을 때 우리는 여름이 지나갔음을, 그 시간을 다독여야 할 다른 시간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제서야' 의 감각이다. 그저 좋아서 타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모기는 팀원들을 위해 광고 현장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가 사고를 치고야 만다. 좋아서 했던 일이 세상으로부터 함부로 이용 당할 때의 수치를 느낀 그는 세상을 그저 가로 지르기로 마음 먹는다. 비단 인라인 스케이트 뿐만이 아니라 어딘가에 몹시 매혹되어 쓸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모조리 매혹에 투자했던 이들이 영원히 버리지 못할 잔고 없는 통장 같은 영화가 [태풍태양]이다.
매일 할인 쿠폰을 쥔 채로 극장에 드나들고 서점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다가 그 중 반드시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한 친구에게 주머니를 통째로 헌납했던 이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도 목이 쉴 정도로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이들에게 이 영화 [태풍태양]는 바퀴의 속도로 굴러와 옆에 앉는다. 20년 만에 다시 극장에서 만난 [태풍태양]은 청춘 영화의 속성이 숙성되었을 때 전해주는 응축된 농도와 여전히 신선한 향기가 뒤섞인 여름이었고 청춘이었다. 여기에 무슨 토핑이 더 필요할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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