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죽였다"… 제주4·3 속 의사들 재조명 목소리

"경찰이 죽였다"… 제주4·3 속 의사들 재조명 목소리
제주4·3연구소 '학술대회'..신영전 한양대 교수 "의사 관련 체계적 연구 필요"
경찰 무차별 발포 3·1사건 비난 성명..고문치사사건 사인 밝혀내 처벌 이끌어
  • 입력 : 2021. 11.26(금) 16:54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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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는 26일 호텔샬롬제주에서 '제주4·3특별법 개정과 그 과제'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송은범기자

"마침 조천장날이었는데 수 많은 주민들이 우리를 기다리며 신작로에 도열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특히 부인네들이 '사인규명을 똑바로 하라'면서 윽박지르는데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형태의 압력과 회유도 있었지만 결국 의사 본분을 지켜야한다는 결심으로 소견서를 양심껏 썼습니다." 1994년 제민일보 4·3취재반이 보도한 장시영(1922~2017년) 회고.

 제주4·3의 광풍 한 가운데 있었던 의사들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제주4·3연구소는 26일 호텔샬롬제주에서 '제주4·3특별법 개정과 그 과제'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신영전 한양대 의과대학 예방의학과 교수는 '4·3 속 의사들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발표에 따르면 제주4·3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7년 제주의 의료 상황은 의원 22개소였으며, 1910년에서 1945년 사이 제주에서 의업면허를 받은 경우는 의사 3명, 한지(限地) 의사 8명(일본인 4명), 준의사격인 의생 49명(일본인 7명) 등이다.

 제주4·3 역사 속에서 의사가 등장한 것은 1947년 도립병원 앞에서 발생한 3·1발포사건 때였다.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부상자가 속출하자 의사들이 치료에 나선 것이다. 당시 도립병원은 "부상자를 옮기던 사람에게까지, 그리고 박애정신을 앞세운 의사와 간호원에게까지 총부리를 들이댄 경찰의 만행에 대해 응분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성명을 이례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어 1948년 3월 잇따라 발생한 '경찰 고문치사사건'에서도 의사들의 활약이 있었다. 당시 도립병원 산부인과장이던 장시영은 조천지서에 끌려가 이틀 만에 사망한 김용철(21)씨의 사인을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 사인'이라고 발표,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 5명의 구속을 이끌었다.

 또 같은달 문종후(1917~1994년) 의사도 모슬포지서에서 연행돼 급사한 양은하(27)씨의 사인을 '고환이 상해서 급사한 것'이라고 발표, 경찰 2명에 대한 검속·취조가 이뤄지게 만들었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된 의사도 7명이나 됐다. 이유는 대부분 무장대를 치료해줬다는 명목 혹은 예비검속으로 인한 것이다.

 신영전 교수는 "당시 의사들은 제주도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동일선상에 있음과 동시에 의사라는 전문직 때문에 특별한 경험을 해야 했다"며 "특히 저항군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살해·검거돼 고통을 받은 것은 분명히 반인도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의사 관련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비교 분석, 사실 확인 등의 작업이 필요하다"며 "또한 의사 뿐만 아니라 약제사, 간호사, 의사보조, 병원직원, 입치사, 침술인 등의 4·3역사도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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