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77)노근리에서(김예태)

[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77)노근리에서(김예태)
  • 입력 : 2020. 09.24(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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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조국은 투병 중이었다

어느 날 숨겨진 병부책(病簿冊)에

썩은 살을 도륙한 노근리의 시술은

히포크라테스를 외면한 음흉한 의사의 오진이었다

맨살로는 너무 더워 개근천 물살로 옷을 짓던 그 해 여름

의사는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을 도려내듯

쌍굴 다리 밑으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개근철교엔 아직도 선명한 눈동자들

더러는 조등이 되어 서로의 길목을 비춰주고

더러는 새떼가 되어 하늘로 올랐지만

아버지 깊은 수심은 삭아 내리는 끈에도 철심을 박는다

월유봉에 떠오르는 달은 횃불을 높이 들고

개근천 물살을 따라 해마다 핏빛 복사꽃이 피지만

눈금 없는 저울은 휘날리는 깃발들을 식별할 줄 모른다

노란 꽃다지 만세 합창하며 피어나는 봄날

아버지와 단둘이 노근리 간다

노오란 아지랑이로 흔들리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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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양민학살사건은 4·3과 쌍둥이다. 1950년 7월 25일~7월 29일 사이에,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 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1994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한겨레'는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그해 5월 4일자로 싣고, 7월 20일자에는 다시 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스케치기사로 실었다. 그 후 월간지 '말'이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하여 그해 7월호에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한 내막을 기사화하였다. '말'은 1999년 6월호에서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 마침내 입 열다' 제하의 기사로 다시 속보기사를 실었다. 그해 9월 미국AP통신은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그해 말 유족들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한국 측과 협의할 예정임을 밝혔다.

2000년 1월 9일 미국 측 대책단장인 루이스 칼데라 미육군성 장관과 민간전문가를 포함한 18명의 미국 측 자문위원단이 내한하여 한국 측 조사반으로부터 사건개요 및 조사상황을 청취한 뒤 영동의 사건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었다.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사건특별법이 국회의원 169명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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