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6살에 데뷔해 25살이 된 배우를 오랫동안 지켜 본다는 것은 팬심과는 또 다른 감정을 들게 하는 일이다. 너무 작고 어리던 이가 내뿜던 맑고 밝은 기운이 여전히 잊히지 않는데 세월의 층을 입은 그의 다채로운 굴곡들이 그 잔상 위로 겹쳐지면 어쩐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시간의 부피가 이토록 도톰한 것이구나 새삼 생각하게 된다. 흔히들 얘기하는 '잘 자란 아역 배우'라는 말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대중들의 고정된 시선들 사이를 오가야 했던 분주한 걸음들, 새로운 도전 앞에 고민해야 했을 무수한 시간들 그리고 직업의 변곡점과 분기점 위에서 멈출 수 없었던 이유들과 동력들이 당연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잘 자란 아역 배우'라는 말은 연기라는 직업을 놓지 않았던 누군가의 삶의 결과이며 여전히 직업적 소명과 소망으로 이어가는 배우의 현재임을 우리는 기특함에 앞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와 <방울 토마토>그리고 <웨딩 드레스>속의 배우 김향기를 기억하는 것은 오래된 추억 속의 어떤 시절과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해맑은 웃음과 투명한 눈물을 가졌던 어린이가 그 복판에서 손짓한다. 시절이 동화와 같이 기억될 수도 있다면 그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시간을 뒤로 두고 오래 잊히지 않을 순간을 만들어 낸 표정이 그에게 있었기에.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속에는 배우 김향기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신과 함께>시리즈와 <증인>이 있고 그의 또 다른 도전이었던 <눈길>과 <영주>, <아이>가 있다. 다채로운 영화들과 함께 드라마 <여왕의 교실>도 잊히지 않는다. 이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몇 가지의 단어로 배우 김향기를 설명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런데 그의 연기 여정을 지탱해 온 한 가지 단어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씩씩하다'는 형용사가 그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굳세고 위엄스럽다'라는 뜻이 그에게 더 잘 어울리는데 어떤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 나아갔던 김향기의 역할들이 동그랗게 이어져 각기 다른 손들을 잡고 있는 모양이 씩씩하기 그지없다. 누군가가 여리고 어리게 보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안에 채워왔던 굳세고 위엄스러운 믿음으로 뚜벅뚜벅 시간들 위를 걸어온 그가, 신파와 감동이라는 장르적 벽 앞에서도 기어코 두드림을 멈추지 않았던 그가 여전히 여기 우리 앞에 있다.
김향기의 신작 <한란>은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하명미 감독의 장편 극영화다.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 꾸준히 발표되어 온 것과는 다르게 장편 극영화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고 특히 <한란>처럼 두 모녀의 여정을 주요한 기둥으로 삼은 여성 영화는 더 귀하다. 영화는 1948년 제주, 남편을 찾아 한라산을 오른 아진(김향기)이 마을에 두고 온 딸 해생(김민채)과 생이별을 겪게 되며 벌어지는 치열한 생존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저 비극이었다고만 말 해서는 안될 시대를 지금 다시 이야기 하기 위해 <한란>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 영화다. 그리고 이 걸음의 선두에 아진을 연기한 김향기가 있다. 앳된 엄마인 동시에 강인한 여성으로서의 아진을 그려내는 김향기의 얼굴은 작품 속에서 시시각각 달라진다. 딸 해생을 향한 애틋한 모성의 얼굴, 사방을 둘러싼 엄혹한 기운 속에서 불안과 분노로 채워지는 표정, 나아감과 동시에 알아감을 체득하는 단단한 눈빛까지 지금까지 배우 김향기의 얼굴에서 언뜻 보였던 모습들이 <한란>에서는 도드라져 나와 작품의 서사를 이끌고 간다. 말 그대로 산을 오르고 바다를 헤쳐서 나아가는 아진은 흔들리면서도 버티고 맞서면서 나아가는 이다. 이 고난의 여정에서, 믿기지 않는 시대의 복판에서 김향기의 씩씩함은 관객을 믿게 한다. 그 믿음은 불가능한 해피엔딩을 향하지는 않는다. <한란>의 포스터에 쓰인 '이 기막힌 일을 너랑 내가 잊어버리면 누가 알아줄까?' 라는 단단한 의지의 절박한 질문을 품은 아진을 향한 믿음이다. <한란>은 배우 김향기의 다음 행보를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자유롭고 씩씩하게 나아가기를, 캐릭터를 통해 세차게 흔들려도 스스로의 힘으로 더욱 강건해지를 응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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