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루의 운수 좋은 날

[영화觀] 루의 운수 좋은 날
지지 않는 얼굴
  • 입력 : 2025. 09.22(월) 02:00  수정 : 2025. 09. 22(월) 08:54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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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루의 운수 좋은 날'

[한라일보] 올해 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그야말로 별들의 회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세계적인 무비 스타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30년 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차곡차곡 성장한 만큼 우정과 축하를 담은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의 방문이 9월 이른 가을의 부산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와 마이클 만, 션 베이커, 미야케 쇼, 이상일 등 동서양을 막론한 거장 감독들을 비롯 밀라 요보비치와 서기, 줄리엣 비노쉬와 양가휘, 사카구치 켄타로와 오구리 슌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전세계 영화 팬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영화의 별들이 부산의 낮과 밤을 수놓고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2046>, <자객 섭은낭>등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 장첸 또한 부산을 찾은 또 한 명의 슈퍼스타다. 그는 한국계 캐나다 감독인 로이드 리 최의 장편 데뷔작 <루의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으로 부산의 관객들과 반갑고 새로운 만남을 함께 했다.

제목에서도 어느 정도 연상할 수 있듯 <루의 운수 좋은 날>은 불운을 피해갈 수 없는 한 남자 루의 이야기다. 뉴욕에서 음식 배달부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인 루는 몇 년 전 사업 실패로 레스토랑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씩을 살아가는 루에게 찾아오는 것은 안타깝게도 기대하지 않았던 불운들이다. 생계를 위해 필수인 자전거를 도둑 맞은 그는 망연자실한 상황에 처한다. 심지어 이제 곧 뉴욕에 도착할 아내와 딸과 함께 살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집마저 사기 당한 루. 수많은 인종이 뒤섞인 채로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는 대도시 뉴욕에서 루는 어떤 하루를 또 살아내게 될까. <루의 운수 좋은 날>은 이 남자 루가 다시금 겪어내는 이틀 간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다.

로이드 리 최 감독은 뉴욕의 겨울 그 쓸쓸한 풍경 안에 한 인물을 세밀하게 그려 넣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는 종종 현대 미술의 화폭처럼 묵묵하게 삶의 장면들을 응시하게 한다. 관객을 루가 스쳐간 시간들 앞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루의 운수 좋은 날>은 그렇게 '지연'이라는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분명 지나간 장면인데 어떤 장면의 인상이 쉬이 잊히지 않고 관람 내내 누적된다. 겪어 보지 못한 삶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함께 데려다 놓는 이 영화의 심장은 루를 연기한 배우 장첸이다. 아내와 딸이 뉴욕에 도착하기 전의 1부와 그들이 도착한 후의 2부로 크게 나눌 수 있는 영화에서 루를 연기한 장첸은 영화의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 불운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에도 요행을 택하지 않는 선하고 투박한 남자 루는 허기와 공포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다. 삶과의 싸움이라는 결과 모를 지속의 순간들마다 그가 선택하는 것은 그저 다음이라는 걸음이다. 그는 멈출 수 없기에 멈추지 않는 사람인 동시에 찾기 위해 나서는 이고 지키기 위해 맞서는 존재다. 이 범상한 인물이 끝내 위대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배우 장첸은 노련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그림자를 루 뒤에 드리우며 영화를 클래식의 범주에 넣게 할 명연기를 선보인다.

영화는 종종 무심하게 배우 장첸의 얼굴을 마주본다. 답을 기다리지 않는 물음으로 이 배우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장첸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들로 루의 불운에 답한다. 안타까움과 쓸쓸함에 그리움을 새겨 넣고 후회와 절망 곁에도 희망과 용기의 기운을 불어 넣으며. 삶이 고통만으로 가득 찰 리 없다는 것을, 다음을 기다리며 자기 앞의 생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최선의 답이라는 것을 우리는 장첸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통해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토록 사소한 평안이 줄 수 있는 축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사한 대답이 된다. 한 번도 불운에 지지 않았던 이의 얼굴에 드리우는 작은 빛을 따라가다 보면 드디어 일렁이며 물결 치는 장첸의 눈동자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영화 속에 존재한 배우가 담을 수 있는 가장 크고 넒은 인물의 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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