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서귀포 관광극장이 철거됐다. 오랜 방치 끝에 내려진 행정적 결정이라 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단순한 빈터가 아니다. 한 세대의 생활문화와 기억, 그리고 지역 도시정책의 좌표가 선명히 각인된 공간의 흉터다. 불과 몇십 미터 거리의 이중섭 생가는 세심한 보호막 안에서 문화 자원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지만, 극장은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했다. 도대체 어떤 기억은 선별해 보존하고, 어떤 기억을 망각의 나락으로 밀어내는걸까?
어린 시절, 처음으로 찾아간 영화관이 서귀포 관광극장이었다. 코미디언 심형래 씨가 주연한 영화였던 것 같다. 제목은 잊었어도 어둠에 휩싸인 객석에서 하얀 스크린을 바라보며 관객들과 함께 웃던 장면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그 극장은 문을 닫았지만, 그 건물이 여전히 서귀포 한 모퉁이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가 됐다. 먼 타지에서 생활해도 고향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지듯, 내 추억 한 자락을 간직한 장소가 도시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한 위안이었다.
관광극장은 한 시대 서귀포 시민들의 문화적 갈망이 물질화된 장치였다. 대형 스크린 앞에서 펼쳐진 희로애락의 시간들은 개인적 추억의 경계를 넘어 지역 공동체의 집합적 정동을 직조해냈다. 하지만 개발의 논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활용도 낮은 유휴지'라는 행정적 범주로 단순화해버렸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화유산을 둘러싼 인식의 계급성을 직시해야 한다. 효율성과 안전성이라는 근대적 합리성의 이름으로 소거되는 공간들이 과연 순수한 행정적 판단의 결과일까.
제주도는 최근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며 보존과 활용 사이의 섬세한 균형점을 모색해왔다. 등명대와 관음사 후불도 같은 근대문화유산의 도 등록문화재 지정은 분명 고무적인 변화의 징후다. 그러나 용담동 선사 유적지 주변의 건축 제한을 둘러싼 논란에서 드러나듯, 보존 가치와 재산권, 개발 욕망이 맞부딪치는 접경지대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잠복해 있다. 이는 문화유산의 위계가 제도적 필터를 통해 재편되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관광 상품화나 외부 시선에 어필할 수 있는 유산은 살아남지만, 시민들의 일상에 스며든 기억의 터전들은 종종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도시는 어떤 논리로 기억을 위계화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그 선별 과정에서 배제되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편향 앞에서 어떤 비판적 성찰을 실천할 것인가.
사라진 극장은 결핍의 현장이 아니라 사유의 실험실이다. 향수에 안주하지 않고 그 상실의 무게와 더불어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도시와 기억의 새로운 문법을 써내려갈 수 있다. 진정한 문화적 지속가능성은 선택적 보존이 아닌, 상처와 균열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사유 안에서만 가능하다. 흔적들과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야말로 망각에 맞서는 우리의 윤리적 응답이다. <이나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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