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44] 3부 오름-(103)빈네오름, 계곡이 있는 오름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44] 3부 오름-(103)빈네오름, 계곡이 있는 오름
‘비녀’인가 ‘빌레’인가, 사전조차 찾아보지 않은 지명해독
  • 입력 : 2025. 09.16(화) 02: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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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네오름은 비녀를 닮았나?

[한라일보]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화전동에 빈네오름이 있다. 표고 658.6m, 자체높이 93m 정도다. 수년 전 이색적인 오름 지명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이 오름이 반복적으로 방송된 적이 있다. 당시 빈네오름의 빈네란 제주어 비녀를 지시하는 말이라면서 이 오름에 'ㄴ'자를 그리며 비녀를 닮았다고 했다.

과연 이 오름 지명 속에 들어 있는 '빈네'란 비녀를 말하는 것인가.

이 오름은 비록 산중에 있고, 여러 오름에 둘러싸여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이 광활하고 평탄해 목장으로 오래 이용됐고, 화전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오름이 웅대하지는 않으나 지형지물로서나 목축 혹은 산림자원 조달 장소로서 지명이 없을 수 없는 오름이다. 그런데도 이 오름 지명이 고전이나 여타 지지에 나타나지 않는다니 신기한 일이다.

불과 이제 60년 정도나 지난 1965년 발간한 '제주도'라는 책에 처음 나온다. 이 책에는 빗내오름, 채악(釵岳)으로 표기했다. 쓰인 지 그다지 오랜 건 아니지만, 이런 지명을 처음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저자 우락기라는 분은 이 지명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 내용을 보면 문헌을 참고한 것임은 분명한데 그것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므로 아쉬울 따름이다.

빈네오름, 넓은 들판과 유려한 능선이 잘 드러난 오름이다. 김찬수

다만 확실한 것은 순우리말 '빗내오름'이건 한자표기 '채악(釵岳)'이건 이런 지명을 쓴 기록이 이 이전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우락기는 이 오름의 지명을 '채악(釵岳)'으로 된 자료를 보고 한글화하면서 '빗내오름'이라 한 것인지, 아니면 한자표기와는 별도로 이런 한글 표기를 어디선가 본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문헌상 오름 지명이 한글로 나타난 첫 지명은 '빗내오름'인 셈이다. 이후 지금까지 출현한 지명은 채악(釵岳), 잠악(簪岳), 빗내오름, 광악(光岳), 빈네오름 등이다.

‘솔도할머니’와 전문가의 대결

그런데 어느 저자는 '빈네오롬'이라 부르고 한자로 채악(釵岳), 잠악(簪岳) 등으로 표기했다면서, 채(釵)는 비녀의 제주어 빈네의 훈독자 표기, 잠(簪)도 비녀의 제주어 빈네의 훈독자 표기라 했다.

여기서 훈독자란 이 글자들이 가지고 있는 뜻처럼 '비녀'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만약 채악(釵岳), 잠악(簪岳)의 채(釵), 잠(簪)이 그 훈 '빈네'가 지시하는 비녀와는 상관없이, 그저 발음만을 취한 것이라면 훈가자 차자방식이라 해야 하는 것이다. 훈독자라고 한다는 얘기는 '비녀와 상관이 있는 오름'에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어리둥절하게 하는 부분은 그다음에 나오는 말들이다. 이 저자는 이어서 "그 주변의 비문에 광악(光岳)으로 표기한 예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빈네, 빈에'는 '빛나-'로 이해한 것이므로 채(釵) 즉, 비녀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들판을 가로질러 오름에 이르는 경계에는 깊은 계곡이 있다. 김찬수



광악(光岳)의 '광(光)'은 '빛날 광'자이므로 훈가자로 썼다면 '빈네오름'이라고 쓴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오직 '빌레오름'을 쓰려고 한 것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이다. '빈네'는 '빌레'에서 기원한 것이며, 따라서 관련 지명 표기도 잘못됐다면서 고쳐야 한다고 했다. '빈네'의 어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지명 표기가 틀렸다니, 용감한 주장이다.

오늘날 빈네오름으로 쓰는 이 지명은 어떻게 알려지게 됐을까? 다음은 '오름나그네'란 책에 나오는 원문이다. "빈네오름은 지도상에 이름이 없다. 표고 659m다. 봉우리 쪽 바위가 쪽 찐 머리에 빈네(비녀)를 꽂은 모습으로 보이는 데서 예로부터 빈네오름이라 불려 온다고 이 마을에 살아온 팔순의 '솔도할머니'가 일러줬다. 이것이 흔히 빌레오름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솔도할머니가 '빈네'와 '빌레'를 구별치 못할 리 없을뿐더러 묘비에 적힌 지명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녀 채(釵)자 채악(釵岳), 또는 비녀 잠(簪)자 잠악(簪岳)으로 돼 있으며, 한글로 빈네오름이라고 명기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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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네’, 계곡이란 뜻의 고대어

이 내용으로만 보면 '오름나그네' 저자가 어느 팔순의 주민을 만나 채록했으며, 이 지명은 묘비에도 등장하므로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빈네오름이라 해왔다는 취지로 읽힌다. 또한, 세간에는 빌레오름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빈네오름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 묘비가 언제 건립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우락기의 '제주도'는 1965년도에 나온 책이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오름의 지명은 빈네오름이라는 점이다.

'빈네'가 무슨 뜻인지 모르니 발음의 유사성과 한자의 훈을 따지면서 비녀를 닮았느니, 비녀를 꽂은 머리를 닮았느니 한다. '빈네'는 빌레를 잘못 쓴 것이라는 전문가도 있다. 모두 남의 다리 긁는 격이다. '빈네'란 '계곡'이라는 뜻이다. 사전조차 찾아보지 않은 주장들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명의 뜻은 이제 까맣게 잊혔다. 이제 와서 그 옛날 고대인들이 새겨 넣은 정보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으니 오늘날의 언어로 풀어보려 한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다시 '오름나그네'의 원문을 보자. "남쪽 기슭을 끼고 내려가는 얕은 골짜기는 바위가 드러나고 더러 흙으로 메워져 잡초가 무성한데 이 보잘것없는 마른 내가 그 유현미(幽玄美)를 자랑하는 안덕계곡(창고천)의 상류임을 알고 실망했다." 조금만 더 진입했어도 표현은 달라졌을 것이다. 들판과 부드럽게 연결된 유려한 오름의 능선, 놀랍게도 그 안에는 깊은 계곡이 숨어 있다. 이 계곡을 '빌레내'라고 한다지만 이것은 고대어 '빈네(계곡)'를 '빈네내(계곡내)'라 하다가 점차 사용 빈도가 높은 '빌레'가 연상되면서 전의된 것이다. '빈네'란 계곡이란 뜻의 고대어다. 아이누어 기원이다. 결국 빈네오름이란 깊고 웅장한 계곡이 있는 오름이란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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