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2)공동체로 똘똘 뭉친 신촌리

[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2)공동체로 똘똘 뭉친 신촌리
재일교포·주민 하나된 마을발전史 '애향탑'에 오롯이
  • 입력 : 2018. 05.07(월) 19:00
  • 김현석 기자 ik012@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닭머루서 바라본 신촌마을.

후학양성 등 상부상조 정신 마을 최고유산
다용도 '남생이못' 조성… 지금은 생태공원
고즈넉한 풍경 속 통행불편 등은 '격세지감'

400여 년 전, 물을 찾아 해안가로 내려가 마을을 새로이 형성한대서 유래돼 붙여진 이름 신촌리(新村里). 하지만 신촌리의 역사는 1300년 고려 충렬왕 당시 제주를 15개현으로 나눌 때 이미 현촌이었던 것으로 미뤄 700여년이 넘는 역사를 갖는다. 당시에는 원당봉을 중심으로 국도변에 마을을 형성했으나 이후 해안의 큰물 주변으로 이주하며 신촌을 형성했다해서 새롭게 명명된 것이다.

지금의 신촌리에는 10개의 행정동이 있다. 지리적으로는 동으로 죽도를 중심으로 조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로는 원당봉을 기점으로 삼양동과 나뉜다. 그리고 북쪽으로 와흘리까지 이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가는 지금의 신촌리 해안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신촌리 입구의 진드르는 제주에서 보기 드문 평평한 평야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비행장후보지로 선정됐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의 흙과 돌을 나르며 땅을 다지는 노역에 동원됐었다. 다행히 일제가 패망해 지금과 같은 너른 평야로 남게 됐다. 현재는 화훼농가와 수박산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유독 공동체가 두드러진 마을이기도 하다. 그 일례로 마을 회관 앞에 애향탑이 세워져 있다. 1970년 대 마을길을 닦을 당시 제일교포들이 돈을 모아 재료비를 보내오고 마을리민들이 노동력을 제공해 신촌리 안길의 전 구간 아스팔트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에 1977년 신촌리 2555번지에 이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가 2015년 지금의 자리로 이설해 왔다.







신촌리 애향탑.

그러나 이런 사례가 처음이 아니다. 신촌리에는 남생이 못이라는 생태자원이 있다. 지금은 늪지로 조성이 돼서 시민공원처럼 활용되고 있으나 이 연못은 사실 인공 연못이다. 80여 년 전 청년들이 합심해 석유 등의 판매 수익금을 모아 밭을 사서 그 곳에 연못을 만든 것이다. 땅을 파고 그 안에 가마니로 물 막음 공사를 한 후 빗물을 받았다. 이를 소와 말의 식수로 활용을 하고 한켠을 나눠 간이 목욕탕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고 수생식물이 자라는 생태공원으로 변모했다.

인근에 위치한 조천중학원의 건립과정에서 역시 공동체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재일본신촌인들이 고향의 후학을 위해 학교 건립을 계획한다. 교사 신축을 위한 목재를 구입해 신촌항으로 보냈으나 배의 규모가 커서 포구에 접안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배에서 바다로 목재를 내리면 신촌리 청년들이 헤엄쳐서 이를 포구로 끌어오고 건져낸 목재는 아낙과 노인들이 달구지에 실어 나르는 일을 한다. 또한 학교 부지는 최초 야적장 인근의 토지주들이 기부체납을 해주어 1029평을 확보해 지금의 조천중학교가 탄생하게 됐다고 한다. 이런 정신은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만연한 지금의 세태에서 복원돼야 할 정신이다.

신촌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초가집.

마을회관 맞은편으로 신촌 초등학교가 있다. 학교의 역사는 1918년으로 거슬러간다. 김관명, 김윤선, 고종인이 부지를 기부하고 건립해 '신성이숙'이 탄생한다. 독립운동가인 김문준, 한상호 등이 교사로 재직하며 후학들을 키워냈다. 이후 1946년 9월 1일 신촌 공립학교로 인가돼 지금의 신촌 초등학교로 이어지게 됐다. 배움의 길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신촌리 출신의 지도자가 많은 편이다.

신촌리의 경관은 닮머루에서 내다볼 때 절경이다. 신촌해안 마을 서쪽지경의 해안가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닭이 알을 품을 듯한 모양이라고 해서 그리 불리어진 곳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유래는 분분하다. 지금은 올래 코스로 편입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바다를 낀 억새밭길을 따라 4·3성터를 지나면 마을과 닿는다.

마을 안길은 거미줄 같은 골목길로 이어진다. 간신히 차 한 대가 지날 만큼의 좁은 길이다. 얽히고설킨 동선이 자칫 정신을 놓는 순간 길을 잃기 딱 좋다. 하지만 천천히 음미하며 걷다보면 제주 옛 마을의 정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귀퉁이 돌아서면 만나는 고즈넉한 초가와 돌담길 그리고 물통 등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다. 그러나 이런 좁은 골목 탓에 마을 분들이 겪는 불편도 많다. 많아진 차량으로 인한 통행 불편과 주차난 그리고 소방도로 확보가 되지 않아 안전의 위험까지 있다. 이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특히 최근에는 빌라 등의 신축 건축으로 인구유입이 늘어나며 거주형태도 변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마을을 지켜낼 지 알지 못한다. 이는 후대의 몫이다. 그동안 지혜로운 공동체 정신으로 마을을 굳건히 지켜온 것과 같이 그들만의 특성으로 신촌리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길 바란다.

<조미영 여행작가>

[인터뷰 / 고구봉 신촌리장]
"후세에게도 공동체 정신 이어지길"

"도시근교 농업 활성화 지원을"

고구봉 이장

신촌리는 인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조선시대 현감들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특히 조규훈 선생 같은 분은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설립해 우리말과 글을 익힐 수 있는 배움의 터전을 마련했다. 또한 1949년 정부에서 '주일대한민국대표부'를 개설할 당시 일본 수도 도쿄의 중심지에 건물을 얻을 수 있도록 거금을 내어주신 분이다.

우리 마을의 자랑은 남다른 공동체 의식이다. 남생이 못이 만들어진 사연과 조천중학원 건립과정 등은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큼 극적이다. 일본에서 고생하면서도 고향을 위해 아낌없이 도움을 주신 고향 분들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애향탑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2000년에 제1회 신촌의 날이라는 행사를 했었다. 일본, 서울, 부산 등에 출타한 고향민들을 초청해 그간의 고마움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는데 올해부터는 다시 행사를 재개해 고마움을 전하고 친목을 돈독히 하고자 한다. 후세들에게도 우리의 공동체 정신이 이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행정에서는 도시근교 농업 활성화정책에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 신촌리에서 재배되는 백합은 전국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하우스 원료비등의 등락으로 부침이 많다. 현실에 맞는 지원이 돼야 한다. 예를 들어 하우스 난방을 위한 유류비등은 지원되지만 대체목재에 의한 난방비는 지원이 되지 않는 것은 현실과 안 맞다. 도시근교의 농촌이 튼튼해야 도시가 살기 좋아진다. 지역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리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510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