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9)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29)
  • 입력 : 2019. 09.13(금)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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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1-1. 삼미동 차이나타운




정체를 모르는 사람에게 쫓기는 꿈을 꾸다가 눈을 떴는데 어둠 속이었다.

용찬은 머리가 찌근거리고 구역질이 올라옴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입을 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머리를 박았으나 헛구역질 몇 번에 신물만 올라왔다. 속이 쓰렸다. 스위치를 찾아 누르니 일그러진 사내가 거울 속에서 용찬을 처량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선반에 놓여 있는 수건을 펼쳐 보고서야 호텔인 것을 알았다.

침대로 돌아와 물병 채 들이키며 갈증을 풀었다. 용찬은 눈을 감고 어제저녁 리화를 만난 이후의 일을 기억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머리만 빙빙 돌 뿐 기억이 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보니 새벽 4시 10분이었다. 불을 끄고 또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혹시, 왕 사장 애인?"
무심코 던진 말에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왕 사장 눈이 그렇게 낮은 줄 아세요? 중국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삽화=고재만 화백



휴대 전화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커튼사이로 햇빛이 숨어들고 있었다. 머리는 한결 개운해 졌으나 속은 여전히 쓰렸다. 시계를 보니 8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액정화면에는 이름이 찍히지 않은 낯선 번호가 떴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 기자님, 일어나셨어요?"

여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시죠?"

"어머, 겉은 멀쩡하던데 정말 많이 취하셨나 봐. 저에요. 베이징 정소영."

그제야 룸 베이징에 찾아갔던 기억이 났다.

"아직 식전이죠? 제가 해장국 잘하는 곳 아는데 나오세요."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면 그렇게 닮은 구석은 없지만 왠지 해연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조선족이란 말이 떠올랐다.

용찬은 샤워를 마치고 바지를 입다가 주머니 속에서 파삭거리는 감촉을 느꼈다. 구겨놓은 여러 개의 카드 영수증 용지였다. 감자탕, 룸 베이징, 국수집. 끊겼던 필름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대룡여행사에서 나와 속이 허하다는 생각에 국수집을 찾았다. 거기서 소주 두 병을 시켜 마시고, 수첩에 적힌 룸 베이징을 찾아간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호텔에서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건너편에 불이 꺼진 룸 베이징의 네온 간판이 보였다. 그녀가 알려 준 곳은 호텔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해장국 집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속을 풀어야 할 사람이 많음에 놀랐다. 용찬이 목을 길게 늘려 정소영을 찾는데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던 그녀가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어제 내가 실수 많이 했나요?"

소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시선으로 용찬을 노려봤다.

"어머 젊으신 분이 술이 왜 그리 약해요? '너 누구냐?'로 시작해서 취재라면서 꼬장 부리더니 위스키 몇 잔에 꼬꾸라지더라고요."

용찬은 머리를 긁으면서도 소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 참."

"그래서 가게 김 군한테 호텔로 모시라고 했죠. 불편하셨겠지만 우리 사장님 호텔이에요."

"그랬구나. 난 취하면 필름이 끊겨서. 헌데 어떻게 술값을 지불했지?"

"어머. 나가면서 카드를 제게 주셨잖아요. 영수증하고 잘 넣어드렸는데."

"그랬나?"

용찬은 무안함을 느끼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런 용찬의 행동에 소영이 까르르 웃었다.

비즈니스 룸 베이징은 중국에서 관광 온 부유층 고객을 위한 고급유흥주점이고 그녀는 그곳 마담이었다. 아가씨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고, 그녀 역시 돈을 벌려 연변에서 왔다고 했다. 동포의 소개로 베이징에 일하게 되었는데 오너의 눈에 들어 마담 일을 보고 있었다.

"혹시, 왕 사장 애인?"

무심코 던진 말에 그녀가 또다시 까르르 웃었다.

"왕 사장 눈이 그렇게 낮은 줄 아세요? 중국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용찬은 무슨 뜻인지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맑고 예뻤다.

"왕 사장은 입버릇처럼 얘기해요. 자기는 한국 여자를 좋아한다고. 예쁜 여자를 가지기 위해서 돈을 물 쓰듯 하지만, 결코 두 번 자는 일은 없대요."

용찬은 금산의 그런 행동은 한국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종필이가 나쁜 놈이야. 그 녀석 리화 임신시켜 놓고도 나 몰라라 하는 걸 억지로 결혼시켰어. 나쁜 자식, 총각 행세하며 그 회사 임원의 딸을 건드려 그 애도 임신시켰지 뭐야."



용찬이 신문사 사무실에서 아침 취재한 기사를 쓰고 있는데 왕강룡 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척 반가워하며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시간에 맞추어 대룡반점을 찾아갔으나 문 앞에 'CLOSE'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향기로운 냄새가 마중 나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 서성거리는데 문에 달린 종소리를 들은 왕 사장이 주방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와. 그리 앉아.

그는 손수 만든 음식을 주방에서 가지고 나왔다.

"아니 점심시간인데 손님이 없어요?"

"은산이가 출장 요리 나가는 날은 장사 안 해. 오늘은 지사 공관에 갔어."

왕 사장은 예전보다 주름살도 많아졌고 머리숱도 많이 빠져서 60대의 동년배들보다 늙수그레하게 보였다. 식탁 위에는 먹음직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아이고 무슨 음식을 이렇게? 짜장면 하나면 되는데."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손님인데, 박대할 수 있나? 자 맥주도 한잔하게."

그는 대답도 듣기 전에 맥주병을 따고 컵에 따랐다.

"제가 먼저."

"아니야. 외롭게 지내다 옛날 사람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기자됐다며?"

"예."

그는 채워진 컵을 용찬 앞에 놓고 자기 컵에도 그득 맥주를 따랐다.

"축하해. 자 쭈욱 들이키고 요리를 먹자."

용찬은 잔을 부딪치며 '간빠이'하고 외쳤다. 시간에 맞춰 급히 오느라 목이 마른 터여서 단숨에 잔을 비웠다, 왕 사장은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용찬이 안주를 집으며 집안 얘기로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며느린 보셨어요?"

왕 사장은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보였다.

"작년 북경에서 식을 올렸지. 그 녀석 한국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우기더니 결국 한족 여자와 결혼 했어. 숙부의 처조카라고 하던가? 하여간 사돈댁이 북경 당 간부고 부자라고 하더구만. 우리 금산인 그럴 자격 있어. 능력도 있고 돈도 많으니까."

"그때 중고차 수출한다던데, 돈 많이 번 모양이군요?"

"숙부님이 많은 도움 줬지. IMF에 횡재했어. 셀 수도 없이 차를 수출하고 돈 많이 모았지. 그걸 밑천으로 중국과 합작해서 사업을 여러 개 하고 있어. 덕분에 나도 주방일 그만두었지."

그는 아들이 대견한 듯 연신 웃음을 흘리며, 비어 있는 용찬의 컵에 맥주를 부었다.

"금산인 앞을 내다보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어요."

"그래? 그래도 난 불안스러워. 너무 잘 나가니까. 욕심 부리지 말라는 데도 그 고집 누가 꺾어? 과욕 부리면 필시 화가 있기 마련이지. 누군가 하나를 얻으면 누군가는 하나를 빼앗기는 것이거든."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야죠.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예요. 헌데 제주엔 자주 오나요?"

"중국 손님 모시고 오는 게 주 업무라 얼굴 보기 힘들어."

용찬은 모아놓은 것 없는 샐러리맨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자넨 아이들 몇이나 뒀어?"

"저 아직 미혼이에요."

"그래? 우리 리화가 자넬 많이 좋아했는데. 에그."

왕 사장의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걸 감추려는 듯 그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금산이 어머님도 잘 계시죠?"

"요즘 우리 할멈 외손자 보는 재미에 살지. 벌써 중학생이야."

"사위는 자주 찾아오고요?"

왕 사장은 대답 못 하고, 맥주 컵만 만지작거리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박복한 년. 지 팔자지 뭐. 도로 혼자 됐어."

용찬이 남의 집안 아픈 일을 괜히 물어봤다고 자책하며 음식을 먹고 있는데 왕 사장이 저간의 사정을 알려줬다.

"종필이가 나쁜 놈이야. 그 녀석 리화 임신시켜 놓고도 나 몰라라 하는 걸 억지로 결혼시켰어. 중국 가겠다고 해서 금산이가 랴오닝에 취직까지 시켜주었는데 제 버릇 어디 가겠어? 나쁜 자식, 총각 행세하며 그 회사 임원의 딸을 건드려 임신시켰지 뭐야. 그러니 리화가 가만있겠어. 당장 이혼 소송 걸었지."

"그럼 종필인 그냥 중국에 있겠네요?"

"아니, 중국 회사도 잘리고 요즘 한국에 있어. 우리 손주하곤 가끔 만나나 봐. 수단이 좋은 놈이라, 중국 기업체 한국본부장이라나 뭐라나. 조선족 애들 앞장세워 삼미동 차이나타운 빌라 장사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 아버지가 타운 건설공사에 참여했잖아."

왕 사장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부친이 제주에 오게 된 사연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용찬은 이를 정리하여 '화교 제주이주사'에 대한 특집 기사를 '강하의 새벽안개를 헤치고'란 제목으로 3회에 걸쳐 연재했다.



대호에게서 사무실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사무실은 시청 부근의 뒷골목 허름한 5층 건물 꼭대기에 있었다. 용찬은 건물의 계단을 부지런히 올랐다. 겨우 삼층을 올라왔을 뿐인데 숨이 차고 다리가 퍽퍽했다. 운동 부족을 탓하며 두 층을 더 올라 '제주경제환경포럼'이라는 팻말을 확인하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빼꼼하게 얼굴을 들이미는데 대호가 열린 안쪽 방에서 나오며 용찬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용찬은 대호가 내미는 손을 맞잡으며 해녀들이 숨을 비우는 것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 숨차. 체력이 많이 떨어졌나봐."

대호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용찬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아니 엘리베이터 놔두고 일부러 운동하셨어요?"

"엘리베이터가 있었어?"

"계단 옆 돌아서면 있잖아요."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못 들은 척하면서 웃고 있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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