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1)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11)
  • 입력 : 2019. 05.09(목) 2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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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5-1. 사랑과 미움의 간극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새잎을 만들고, 나이테 한 줄을 더 한다.

집안 내력을 알게 된 용찬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흔들렸다. 해연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눈물로 일기장을 채우며 며칠 밤을 하얗게 새웠다.

결국, 해연을 잊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일기장을 불태웠다.

“당장 방을 옮기쿠다.”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3이 되면 자취하기 힘들어 하숙집으로 옮긴다고 어머니는 종필이 어머니에게 말을 했다. 그러나 당장에 구한 곳은 예전보다 작고 누추한 자취방이었다.

그곳에서 용찬은 대입 준비에 매진했다. 사회정의를 밝히는 기자가 될 꿈을 가지고 신문방송과에 지원할 목표도 세웠다.



열병을 앓고 나면 아이들이 부쩍 성장하는 것처럼,
용찬도 그 일 이후에 매사를 의구심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건 세상 이치에 눈떠 가는 과정이었다





“용찬아, 오랜만이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늦은 밤에 자취방 부근에서 종필을 만났다. 순간 용찬은 고개 숙여 딴청을 부리다가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종필을 바라보았다.

용찬은 아무 말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했다. 종필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다. 그는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연신 두 팔을 올려 권투 하듯, 용찬의 몸을 툭툭 치며 자취방까지 따라갔다.

”아 아파요. 왜 기분 좋은 일 있어요?“

”흐흐흐, 한 방에 조져 버렸거든.“

”싸웠어요?“

”아니, 보스에게 칭찬받았지. 수금 안 되던 가게에 찾아가서 빚쟁이를 왼발 돌려차기로 꼬꾸라뜨리고, 발로 몇 방 갈겼더니 금방 돈을 가져오더라고. 흐흐흐.“

”아니 왜 사람을 패고 그래요?“

”이 세상에는 나쁜 놈이 너무 많아. 남의 돈을 떼먹고 말야. 말로 해서 안 되는 놈들은 매운맛을 보여줘야 해. 안 그래? 하긴 너 같은 범생이가 알 리가 없지. 흐흐흐.“

나쁜 놈이라는 말에 그의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지만, 용찬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종필은 지난 선거 이후 더 과격해진 것 같았다.

”왜 이리 작은 곳으로 옮겼어? 우리 집터 안 좋다고 누가 얘기하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공부도 안되고 그냥 환경 좀 바꿔 보려구요.”

“야 임마, 우리 아버지가 생각해서 공짜로 빌려준 건데. 왜 그걸 걷어차?”

용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사글세 대신 해산물을 공급하는 건 알았지만 왜 그랬을까?

그런 사실을 알면서 장 씨 집안에 자취방을 구해 준 연유를 따졌으나, 어머니는 대답 대신 눈물만 보였다. 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닌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열병을 앓고 나면 아이들이 부쩍 성장하는 것처럼, 용찬도 그 일 이후에 매사를 의구심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건 세상 이치에 눈떠 가는 과정이었다.

용찬이 머쓱하여 대답을 못 하는데 종필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이제, 너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왜? 어디 가세요?”

“그래, 중국 간다. 우리 부친께서 중국으로 진출했거든.”

예전에 그가 중국에서 사업하겠다던 말이 생각났다.

“형. 꿈이 이루어지겠구나?”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1978년부터 개혁·개방 정책을 시도하면서 서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정책과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경제체제를 이루었다. 내부적으로 국가 경제체제를 개혁했고 외부적으로 개방을 서둘렀다. 흑묘백묘(黑猫白描)론을 내세우며,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병행함으로써 혼합경제 체제를 유지했다.

이런 체제의 장점은 국가가 소유한 국유기업(국영기업)들의 직접 시장 참여를 조장함으로써 산업영역에서의 경쟁을 유발했다. 상당수 국유기업이 중국 및 해외 주식 시장에 상장해서 주주 자본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국영기업들이 석유, 통신, 전력, 철도 등 산업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데 비해, 중국의 국유기업은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생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잦은 내우외환으로 인해 당시의 중국의 국부(國富)는 서구 여느 나라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시행한 후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를 거치면서 연평균 10%의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불과 이십여 년 사이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서게 됐다.

1984년 중국은 경제특구를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가속화했다. 기존의 경제특구 외에도 국가 차원의 개발구를 설립하여 다렌(大連), 칭다오(靑島) 등의 몇 개 도시와 연해안을 따라 연해경제개방구를 지정하여 개방했다.

그리고 개발 지역을 도시에서 해안으로, 점차 내륙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다렌, 텐진(天津), 광저우(廣州) 등 10개의 개발구가 설립되고, 1985년 이후 푸저우(福州), 상하이의 민항(閔行), 홍차오(紅橋), 차오허칭에 개발구가 설립됐다.

이 시기 개발구에는 외자 유치와 기술도입 등의 자치권이 주어졌고 외국자본에 대한 우대조치가 이루어졌다. 1989년 이후에는 산둥반도, 요동반도, 환발해지구, 해남도를 경제특구로 지정함으로써 대외 개방의 범위가 넓어졌다.



지하에 천연가스가 무진장 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믿고 장석규 씨는 빚을 내면서 거금을 투자했다.
서기와 계약하고 중국 정부로부터 50년간 땅을 임대했다
종필은 갑부가 되는 부푼 꿈을 안고 큰소리쳤다





그 시기 종필의 부친 장석규 씨는 중국에 땅을 임차했다. 장석규 씨가 땅을 임차하게 된 연유는 이랬다.

영국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무슨 위원회에서 중국에 진출해 사업을 했다. 그런데 부지 임차와 공사비를 위한 자금이 부족해 비밀리에 동업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사업은 지하에 매장된 천연가스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지하에 천연가스가 무진장 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믿고 장석규 씨는 빚을 내면서 거금을 투자했다. 다렌 지역 당 서기와 계약하고 중국 정부로부터 50년간 땅을 임대했다.

“곧 시추작업을 하거든? 천연가스가 나오기만 하면 졸지에 갑부가 된단 말이다. 알겠냐?”

종필은 갑부가 되는 부푼 꿈을 안고 큰소리를 쳤다. 부친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종필이 연락책임자로 남는다고 했다.



삽화=고재만 화백

종필의 말을 들으면서 장동철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으나 용찬은 꾹 참았다. 털어놓아서 달라지는 것은 종필과 멀어지는 것뿐이다. 그가 중국으로 가버리면 볼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종필은 용찬을 붙잡고 오랜 시간 집안의 비사까지 늘어놓았다.

종필은 자신에게 양아버지가 있다고 했다. 장동철 씨는 부인이 여럿이었는데 배다른 작은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부친 장석규 씨와 동갑이어서 군대도 같이 갔고 전방에 있는 같은 부대에 배치받았다. 숙부 장덕규 씨는 싸움을 잘했다. 그런데 그를 괴롭히는 고참병이 있었다. 고참병은 장덕규 씨를 고문관 취급했고 그는 늘 개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장덕규는 고참병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두 사람 중 누가 죽어도 이의 신청하지 않을 것을 각서하고 사내답게 맨주먹으로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고참병은 합기도 선수였다. 그런데 싸움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만신창이가 된 고참병의 죽음으로 끝났다. 장덕규가 칼을 사용한 게 부검 결과 드러났다. 자괴감에 자책하던 장덕규는 현장검증을 마치고 돌아가는 헌병 호송차에서 오줌이 마렵다고 내렸다. 그리곤 절벽 아래로 떨어져 인생을 하직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환경조사서를 쓰면서 종필은 장덕규의 양자로 입적되었음을 알았다. 그때야 부친이 그런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가 숙부의 양자가 된 건 할아버지 유산을 물려받기 위한 아버지 꼼수야.”

“형. 아버지가 아니라 큰아버지잖아?”

“그런가? 허허허”

종필은 그게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큰아버지 장석규 씨도 선거에 나가려나 봐. 지난번 선거 치르면서 사람들도 많이 알았고 좋은 경험을 해서 자신 있나 봐.”



장동철 씨는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초선임에도 도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믿었던 시골 이장 몇 명이 양심고백을 하는 바람에 돈 봉투를 돌린 게 들통났다. 고등법원까지 유죄를 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선거와 재판하면서 막대한 돈을 썼다. 땅은 많았지만 내놓아도 매매가 안 돼서 경제적으로 쪼들림을 받았다.

그 불똥이 대룡반점에도 튀었다.

선거 참모들이 무수히 드나들며 장부에 달아놓고 먹은 음식값이 엄청난 액수였다. 그러나 정산하면서 재료비도 안 되는 돈을 내밀었다. 나머지는 땅을 팔면 준다는데야 왕 사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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