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9일 진행된 2025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4차 행사 참가자들이 계곡을 건너고 있다. 정은주 여행작가
선덕사 일주문에서 여정 시작멸종위기 난초 지네발란·풍란…숲길마다 숨은 생명들과 조우빗물 젖은 도시락, 평생 기억
[한라일보] 찜통 같은 더위와 굵은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나날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보다 더한 게 요즘 날씨가 아닐까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빛이 바뀌니 사람 속도 덩달아 복잡해진다. '2025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네 번째 탐방이 있던 지난달 9일에도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주말 아침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40명에 가까운 인원이 선덕사 입구에 모였다. 현판에 '漢拏山선돌善德寺'(한라산선돌선덕사)라고 적힌 일주문이 참가자들을 반겼다. 화려한 단청을 입힌 처마가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뻗어 있어 더욱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일주문 너머로는 사찰로 통하는 숲길이 이어져 있다. 녹음이 우거진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선덕사 경내에 들어섰다. 선덕사는 한라산의 신령스러운 기가 모여든다는 선돌 지역. 고대 절터에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이다. 특히 2층 목조 건축물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금당)은 제주도에서 유일한 중층 목조 구조로,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나가면 한라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미륵대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에 가득한 온화한 미소가 흐릿한 하늘과 대조돼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선돌선원에 뿌리내린 수령 600년 된 적송을 지나가는 참가자들.

참가자들이 선덕사 일주문 앞에 모여 해설을 듣고 있다.
선덕사를 떠나 효명사로 이어진 계곡을 건너면서부터 점차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급기야 한바탕 폭우가 쏟아졌다. 우비를 입고 있었지만 빗물이 여기저기 튀고 전보다 내딛는 걸음도 더 조심스러워졌다. 탐방길이 다소 고생스러워졌음에도 앞서 걷는 이들에게선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들의 시선이 멈춘 곳에 손톱만큼이나 작은 꽃을 피운 지네발란이 있었다. 산속 오래된 나무나 바위에 달라붙어 자라는 형태가 지네 발 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듬성듬성 피어난 분홍빛 꽃들이 마치 연지곤지를 찍은 새색시처럼 수줍게 느껴졌다.

산중에 숨은 포토존

말오줌때

사위질빵

석곡

지네발란
"지네발란은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에 지정돼 있습니다. 그 위쪽으로 붙어 있는 석곡도 마찬가지고요." 인솔을 맡은 이인구 자연환경해설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이쪽 나무에 차걸이난이 자라고 있는 것 보이시죠? 저쪽에는 멸종위기 1급에 속하는 풍란이 착생돼 있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희귀한 난초 투성이다. 콩짜개덩굴이 온몸을 휘감아버린 나무도 보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귀한 난들을 사진에 담느라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걷는 내내 인적 드문 산길은 온전히 우리들 차지였다. 세차게 흘러내리는 계곡 물길을 따라 오르는 길. 이 물줄기가 효돈천을 이루고 쇠소깍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빗소리와 물소리가 하모니를 이룬 숲길은 그 자체로 거대한 악기가 된 듯했다. 조용히 자연이 들려주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콸콸'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 '솨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가 어우러지며 완벽한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차걸이란
이내 발걸음이 선돌선원에 닿았다. 깊은 산중에 들어앉은 작은 암자엔 고요한 기운이 가득했다. 선돌 일대는 옛적부터 수행을 위해 많은 수도승들이 찾던 곳이다. 커다란 나무 밑에 도시락을 펼쳤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막을 수 없었다. 눈물 젖은 밥은 먹어봤어도 '빗물' 젖은 밥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맛이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오히려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얻었다.
당초 계획은 선돌선원을 지나 수악길(한라산 둘레길)까지 오르는 것이었으나 미끄러운 빗길과 폭우를 염려해 하산을 결정했다. 안전을 우선시한 조처였다. 희뿌연 안개에 둘러싸인 거대한 선돌을 뒤로한 채 아쉬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비록 예정한 코스를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산행이었다. 선돌 지역에 얽힌 일화와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았던 화전민들의 역사, 구실잣밤나무가 무용지용(無用之用)이 된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풍성한 해설이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곧게 난 숲길을 따라 되돌아가는 길, 하늘도 미안했는지 비구름이 잠시 걷혔다. 물기를 머금은 초목마다 청량함이 넘쳐흘렀고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눈길 닿는 곳마다 싱그러운 초록빛이 다시 찾아오라고 부추기는 듯했다.
<정은주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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