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규 칼럼]'대탐라전' 무엇을 담을 것인가

[강문규 칼럼]'대탐라전' 무엇을 담을 것인가
  • 입력 : 2011. 11.01(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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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가 내년부터 탐라문화제를 '대탐라전'으로 개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열렸던 탐라문화제를 개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 일단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하다. 문화예술계는 물론 다방면의 전문가들의 지혜를 결집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몇 년 전 전라남도 강진에 들른 적이 있다. 강진에는 제주 역사의 편린들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어서 제주인들이 한번쯤 답사할 만한 곳이다. 강진의 원래 이름은 탐진(耽津), 즉 탐라의 나루터라는 뜻이다. 강진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마량포(馬良浦)도 그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일대에는 제주의 현무암 돌이 많이 남아 있다. 어떻게, 왜 제주돌이 이곳으로 오게 됐을까. 조정에 진상하기 위해 배에 말을 싣게 되면 배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게 된다. 말과 함께 돌을 배 양현에 실은 것도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함이었다. 육지로 하역 된 말들은 배 멀미 등으로 일정기간 휴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주에서 실어 온 돌로 잣성을 쌓았는데 그곳을 '마유장성(馬留長城)'이라고 일컬었다.

강진에는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하멜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하멜 일행은 제주에 표착한 뒤 강진으로 건너가 오랜 세월 묶여 있다가 일본으로 탈출했다. 강진에 하멜 자취가 남게 된 것도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제주역사·문화와 관련된 지역은 전라남도 곳곳에 널려 있다. 진도에는 삼별초가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 진을 쳤던 용장성이 남아 있다. 진도의 전통주인 홍주는 제조법이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3대 명주의 하나였던 '제주소주(고소리술)'와 흡사하다. 어디 그 뿐인가. 청산도는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시조라고 평가받는 제주사람 장한철이 지은, 표해록의 무대를 이루는 곳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우이도도 찾아갈 필요가 있다. 그 섬은 19세기 초 제주 관리의 모임인 상찬계의 비리와 학정을 타파하기 위해 나섰다가 억울하게 숨진 양제해(梁濟海)의 사건을 역사에 올바르게 기록한 의로운 선비의 자취가 남아 있다.

제주역사와 관련된 지역이 어디 전라도에 국한되겠는가. 눈을 돌려 주변국으로 살펴보면 그 범위는 대단히 넓고 많다. 서기 7~8세기 무렵 탐라의 왕이나 사신들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일본과도 활발한 교역을 통해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제주인들은 뜻하지 않은 풍파로 해외에 표류된 뒤 극적으로 귀환, 그 전말을 기록하거나 이야기로 남김으로써 해외 정보에 목말라 했던 조정과 선비들에게 지적욕구를 채워주는 정보의 발신지가 되기도 했다.

한 때는 독립된 왕국으로 존재했던 탐라국도 발아기, 융성기, 쇠퇴기가 있었다. 그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국제자유도시를 향한 지혜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제 탐라문화제는 새로운 변신의 몸짓이 필요하다. 축제는 단순한 놀이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한 부족이, 또는 특정집단이 공동체의 결속과 융성을 위해 신에게 제를 올리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춤과 노래를 즐겼던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제주를 대표하는 축제 역시 당연히 그런 모습을 형식과 내용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탐라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일도 그런 작업의 하나다.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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