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보면 주변 풍경들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가을비가 내려 을씨년스러운 날 마주친 구제주대학병원 건물도 그렇다. 내원객들로 붐비던 병원경내는 오래 전부터 철책을 두르고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병원 건물벽에 붙여졌던 여러가지 간판들도 뜯겨져 간 곳이 없다. 그러나 간판이 사라졌다고 그 이름과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 LPGA에서 첫 우승을 할 당시 박세리선수가 러프에 빠진 공을 치기 위해 그녀가 양말을 벗었을 때 드러났던 하얀 발을 보지 않았는가. 오히려 간판을 걷어냄으로써 구제주대학병원터의 역사와 자취, 그리고 그 건물을 방치하고 있는 유관기관들의 무책임과 무관심이 더욱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지금은 지나가는 행인들 조차 혀를 차며 지나가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구제주대학병원터가 갖고 있는 이력은 범상치 않다. 그곳은 조선시대 판관이 집무했던 이아(二衙)터로 제주목사에 이어 두번째 권력자가 정사를 폈던 곳이다. 그 이름을 찰미헌(察眉軒)이라고 불렀다. 판관은 목사를 보좌하면서 지역방어를 위한 막중한 업무영역을 거느리고 있었고, 목사가 부재중일 때는 삼읍수령을 대표하기도 했다. 1900년대초 행정체제가 바뀌며 판관제가 폐지된 뒤 그곳에는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자혜원이 세워졌다. 그 후 제주도립병원, 제주대학병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제주의료의 구심체 구실을 해 왔다. 그래서 그곳은 조선시대에는 제주섬을 지켰던 보루였고, 근·현대에는 제주의료의 선구적 터전이었다. 그 만큼 도민들의 애환이 짙게 서려 있는 터전이다. 제주대학병원이라는 미숙한 신생아를 건강하게 키웠던 인큐베이터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날 제주대학병원은 새로운 병원이 들어서자 야반도주(夜半逃走)하듯이 그곳을 떠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다. 병원 이설로 인한 후폭풍은 즉각 나타났다. 하루에도 수천명이 드나들던 곳이어서 주변 상권의 침체와 도심의 피폐 현상도 가속화 됐다. 위기를 느낀 지역상인과 주민들은 여러차례 건물 소유자인 제주대학교와 제주자치도에 시급한 대책을 읍소했다. 전문가들도 구대학병원의 활용방안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한 때는 대학과 도관계관들이 머리를 맞대어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 후 아무런 후속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학은 도심캠퍼스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내부수리와 같은 리모델링에 필요한 수십억원의 예산을 도가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도정은 10~20억원도 아닌 100억원대에 이르는, 그것도 제주자치도 소유도 아닌 국가 소유의 건물에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는 것에 난색을 표시해 왔다. 그러자 대학은 자체 예산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뒤로 물러 앉고 있다. 그렇다고 관련부처에 예산확보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아직도 쓸모가 많은 거대한 건물은 도심의 흉물(凶物)로 변하고 있다. 두 기관이 서로에게 "짐진 사름이 팡을 찾는 법"이라며 떠미는 사이 주변 도심과 상권은 날로 쇠락하고 사람들은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고 있다.
때때로 구제주대학병원 건물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제주대학과 도정은 과연 도민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진정으로 제주와 도민들을 걱정하는 기관들인가"라고 말이다. 100억대에 이르는 예산확보가 쉽지 않음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고 국립제주대학과 제주도정이 지혜를 모아 역할을 분담한다면 해결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수년이 흐르도록 진척이 없는 단 하나의 원인은, 제주사회와 도민들에 대한 애정결핍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