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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7)송악산(상)
해안절벽 치는 파도… 예부터 절(파도)이 운다고 절울이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0. 07.0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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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승, 시대적 의미 갖는 경관 언어
향토사인 '지지(地誌)' 중요성 커

경치, 사람마다 다른 아름다움의 눈


#지명, 고고학 지층처럼 시대마다 다른 의미

하나의 지명(地名)은 사람들 간의 합의에 따라 지어진다. 한 지명이 여러 개 지명으로 불리는 것은 언어가 시대마다 새롭게 붙여지거나 새로운 의미가 등장하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그것이 기록으로 전해져 그 지명이 마치 고고학에서의 지층처럼 시대마다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송악산 능선에서 본 풍경.

옛날 경치가 뛰어나고 아름다운 곳을 형승(形勝)이라 불렀고, 그 멋진 곳을 찾아 거기 풍경을 즐기는 것을 탐승(探勝)이라고 했다. 형승이나 탐승이라는 말에는 조선시대 유가(儒家)에서 인격을 수양하거나 도야하기 위한 선비의 이념이 들어있다. 가령 대정의 형승에 송악(松岳)이라는 곳이 있는데 '송악탐승'이라 하게 되면 대정지역의 아름다운 송악산 경치를 구경하는 것이 된다. 옛날에 쓰던 형승이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landscape'라는 의미로 부르는, 경치·풍경·경관 등의 말로 변했고, 그리고 탐승은 'travel', 'tour'의 의미로 구경·유람·여행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때 지명, 언어 또한 역사의 주름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인생은 다양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나 선택한 순간 거기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택한 것에는 의미가 있게 되고 그것이 여러 사람들과 공감하면서 소통하게 되면 그 의미는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가는 이유 또한 ~답사나 ~기행, ~탐방, ~기념 등의 이름으로 저마다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된다.



#송악산(松岳山)에 대한 여러 기록들

우리가 현재 부르는 대정읍 상모리 소재 송악산은 지금으로부터 542년 전 역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송악산이라고 불렀는데, 그때의 속명(俗名)이 저별이(佇別利)였다. 속명이란 이미 그 시대 이전부터 민간에서 불렀던 이름을 말한다. 500여 년 전 당시 송악산에 대한 그 기록을 보면 "송악산, 대정현 남쪽 15리(1리:0.4km, 현 보성리에서 약 6km 거리)이다. 산의 동쪽·서쪽·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다. 석벽으로 둘러져 있고, 산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직경이 백여 보나 된다.…송악봉수가 있어 서쪽으로 모슬포악(毛瑟浦岳)에 응하고 동쪽으로 굴산(屈山)에 응한다." 실제로 송악산은 머리 모양처럼 튀어 나와 있어 산의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있다. 송악산 정상의 분화구가 못으로 표현된 것이 흥미롭다. 못의 깊이가 백여 보면, 한 보에 70cm만 잡아도 그 깊이가 70m가 넘는다.

송악산의 옛 이름은 파도가 운다고 해서 절울이었다.

송악산에 대한 다른 기록은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의 '남명소승(南冥小乘)'에 있다. 임제는 선조 16년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부임하던 중 송도를 지나는 길에 유명한 기생 황진이 무덤 앞에 술상을 차려놓고 시조를 지어 양반의 체통을 잃었다는 비난을 받았던 조선 사회 화제의 인물이다. '남명소승'은 임제가 선조 10년에 문과에 급제하자 1577년 11월 3일 당시 제주목사로 부임해 있던 아버지 임진(林晋)을 뵈러 왔다가 제주도 곳곳을 유람한 그의 여행기이다. 임제는 제주도로 오는 도중 지인에게 취중에 시를 하나 지었는데, "한 잔 한 잔 산 마을 막걸리/천리라 만리라 한바다로 떠나는 배…"라고 하여 자신의 순간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던 조선 제일의 풍류가다. 1577년 11월 26일 맑은 날 임제는 아침 식사 후 세 사람을 데리고 송악산에 올랐다. 아마도 기록상 외지인 중 송악산에 처음 오른 인물일 것이다. 송악산은 그의 표현대로, '산은 평지에서 우뚝 솟아올라 남으로 달려 바다로 들어가 끊어졌다. 그 산 위는 손바닥 모양으로 평평했으며 북쪽으로 기암이 마주 서 엄연히 하나의 돌문을 이루었다. 나지막한 돌 구멍으로 들어가서 마치 석가산(石假山:돌을 모아 쌓은 인공 산)처럼 종횡으로 나열해 있으니 참으로 누가 조화를 부린 것 같았다. 더욱 기괴한 것은 끊어진 듯한 절벽이 높이 천길이나 솟았는데 모두 파도가 깎아버린 형상이었으며, 그 앞 봉우리 하나는 모래가 쌓여 봉긋 솟은 것이었고, 위로 바닷물이 들고 난 흔적이 보였다.… " 임제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대정 현감과 송악산에 잠깐 머물렀다가 바람이 어지럽게 부는 탓에 대정현으로 돌아와 현감과 작별하고는 서문을 나와 명월 방호소로 떠났다.

1601년 길운절, 소덕유 제주 역모 모의 사건의 민심을 위무하기 위해 선조 때 제주안무어사로 왔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남사록(南차錄)'(홍기표 역주, 2009)에, 그는 10월 17일 대정향교에서 공자를 배알하고 점심 후 모슬포로 가는 길에 송악산을 구경했다. 김상헌은 송악산에 대해서 '남명소승'과 '지지(地誌)'를 인용하고 있을 뿐 따로 송악산에 대한 감상이 없지만 '송악산(松岳山)'이라는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옛날부터 이 땅을 영주라 불렀으니/바다로 둘러진 명산 모두 놀기가 좋구나

하늘로 솟은 노대(露臺, 밤하늘을 관찰하는 장소)는 만 길이나 될 듯하고/돌 안반(安盤) 운골(雲骨)은 천추(千秋)를 보냈네.

생황 부는 달밤에 신선과 벗하면/천막 펄럭이는 봄바람에 황홀경을 보겠구나

가볍게 날아올라 신선이 되었으니/하늘로 바로 올라 봉래산으로 가고 싶어라."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겸절제사를 지냈던 이익태(李益泰, 1633~1704)는 '지영록(知瀛錄)'에 송악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1694년 8월 15일 아침, 대정현에서 군기를 점검하고 향교 학생들에게 시강(試講)을 한 후 향교에서 5리 되는 송악산에 올랐다. "3면에는 절벽이 깎아서서 파도가 와서 부딪치면 성난 파도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 막다른 끝에는 천여 명이 거의 앉을 수 있어 자못 동굴과 산봉우리의 정취와 어울려 아주 넓고 멀리 보여 웅혼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평평한 언덕의 한 맥이 꾸불꾸불하며 바다로 들어가다가 저절로 하나의 오름을 만든 것 같고, 앞에다 아마 섬(형제섬)이 다시 솟아오른 것 같다(김익수 역, 2010)."

송악산의 파도 소리는 해안 절벽을 치며 우렁차게 우는 소리를 내기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절(파도의 제주어)이 운다고 하여 절울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구전으로 전한다. 이 절울이의 음을 한자로 따서, 저별이(佇別利), 저별리(貯別里), 저별악(貯別岳)이라는 송악산의 옛 이름이 되었다.



#지방 관아서 발행한 '지지(地誌)’의 기록

세월이 흘러도 후세의 사람들은 '지지(地誌)'를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지지'란 해당 지역에서 발행한 역사 기록, 즉 지방 관아에서 발행한 향토지의 다른 말이다. 많은 역사서에 소위 참고문헌 격으로 이 '지지'에서 인용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지가 외지 사람들이 현지 정보를 얻는 기본적인 문헌이기 때문이다.

'남사록'에 원용된 '지지'의 기록은 17세기 이전에 회자되던 송악산에 관한 것이다. "송악산은 대정현 남쪽 15리에 있다. 속명은 저별리라고 한다. 송악산은 멀리 뻗은 형세가 없고 바다에 툭 튀어 일어서 있다. 둘레는 겨우 십여 리이다. 온통 꾸불꾸불한데 동남쪽 한 구석은 평평하고 넓은 것이 마치 제단과 같아 몇 백 명이 앉을 만하다. 그 아래는 몇 만 길도 더 되며 우뚝 솟은 것이 바닥을 볼 수가 없다. 큰 파도는 거세게 솟아오르고, 멀리 바라보면 바다는 하늘과 이어져 한 점 섬도 없다. 따라온 하인이 말하기를, 옛날에 바다 송골매가 절벽 중간에 와서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그때의 목사가 새끼를 잡으려고 큰 밧줄에 한 사람을 매달아 내렸습니다. 끌어당기려고 할 때 갑자기 밧줄이 끊어져 그 사람은 온몸이 부서져 바다에 빠졌는데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 모릅니다." 라는 송악산의 기록을 적고 있다.

또, 1679년 숙종 때 제주안핵겸순무어사로 왔던 이증(李增,1628~1686)의 '남사일록(南차日錄)'에는 송악산에 대해 '남명소승', '지지'를 다시 인용하면서, 화산암의 거친 모습을 매우 낯설어 하고 있고 멀리 보이는 용머리 해안에 대해서는 감탄을 하고 있다. "송악이 바다로 들어가면서 이룬 높은 절벽은 별로 아름다운 경치는 없다. 그러나 섬 가운데 산들이 모두 악석(惡石)으로 밉게 생겼으나 송악의 하나의 맥인 만두(蠻頭:용머리)는 곱고 아름다워 바다를 곁에 두고 또 돌 병풍을 이루고 있어 완전히 딴 모양이라 믿기지 않는다." 어떤 경치라도 사람에 따라 그 대상을 보는 눈이 항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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