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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장편 연재/갈바람 광시곡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2)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19. 12.12. 2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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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4-2. 가을비는 낭만에 젖고



랴오닝이 물탱크라면 전형진은 수도꼭지란 말이야. 꼭지만 파기해버리면 하나도고 나발통이고 다 9회 말 게임 아웃이야.


용찬은 장종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인데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권 기자. 퇴원했어? 나 그러지 않아도 상의할 일도 있고 좀 보려고 했어."

전화를 끊고 얼마 안 돼서 종필이 사무실로 찾아 왔다. 얼굴은 붉고 술 냄새가 풍겼으나 행동은 취한 사람 같지 않았다.

"뭔 술을 아침부터 마셔요?"

"아침이 아니라 새벽까지 마셨지. 하지만 너무 분해서 술도 안 취해."

종필은 의자에 앉으려고 걸어오다가 탁자 모서리에 턱 하는 소리가 나게 부딪치더니무릎 언저리를 만지며 미간을 찡그렸다.

"하이고 아파라. 이젠 하찮은 것들마저 날 무시하네."

"다치지 않았어요?"

삽화=고재만 화백



그는 의자에 앉아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무릎을 확인하면서 연신 손바닥으로 문질러 댔다. 정말 아픈 듯 얼굴 찡그리고 후후 불면서 엄살을 떨었다.

"피는 안 나는데 무지 아프네."

"조심 하시지. 그렇게 새벽까지 마시도록 무슨 일 있어요?"

"그 전형진 새끼가 배신했어. 우리 아버지가 꼬붕 노릇 얼마나 했는데, 장석규 씨를 탈락시키고 결국 자기 외조카를 공천했지 뭐야. 그 개새끼 나 가만 안 놔둬."

종필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속이 타는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오 양에게 냉수를 부탁했다.

"부친 속도 말이 아니겠네요?"

"아버지도 분해서 술에 살아. 헌데 조금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야. 지금 증거 찾아서 전 지사뿐 아니라 두목회 놈들 싹 다 까발릴 거야."

용찬은 두목회를 까발린다는 말에 오금이 당겼다. 그러나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왕금산이었다. 이 거사는 왕금산과 연결되어 있고 그가 그냥 앉아서 당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용찬은 익히 당해봐서 안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가 당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왕금산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그 새끼 삼미동 분양 사업에서 우릴 팽 시켰어. 나도 복수할 거야. 그 놈 사업도 끝장내버릴 거라구. 친구라는 널 그렇게 두둘겨 패는 새끼가 인간이야? 돈독 오른 괴물이야. 중국놈이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깝쳐? 짱궤놈의 새끼가."

"형도 조심해. 그놈 뒤에 중국 조폭들 있어."

"누군 없는 줄 알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똘만이들 대기시켜 놓았어. 어디 한번 붙어보자 그래."

종필은 이미 모종의 계획을 마련해 놓아서 기대가 된다는 듯이 어금니를 악물며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왼 손바닥을 쳤다.

용찬도 전개될 일들을 상상하니 몸이 떨렸다. 종필은 오 양이 떠온 물 컵을 받아들고 벌컥대며 단숨에 비웠다.

"무슨 방법 있는 거예요?"

"전형진이 랴오닝 뒤를 봐주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정황상 그렇다고 봐야죠?"

"본인은 잡아떼겠지만, 증거 찾으면 그 새끼 아웃이야. 랴오닝이 물탱크라면 전형진은

수도꼭지란 말이야. 꼭지만 파기해 버리면 하나도고 나발통이고 다 9회말 게임 아웃이야. 이거 극비야. 알겠지?"

"그럼요. 헌데, 증거를 어떻게 찾는다는 거예요?"

"꼼짝 못 할 확실한 증거 있어. 이미 확인했고 수집 중이야. 찾으면 맨 먼저 너한테 알려 줄게. 나 아직도 랴오닝에 연줄 있거든."

종필이 랴오닝 그룹 임원 딸과 연애를 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성공에 대한 어떤 확신 같은 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일부러 태연한 것처럼 화두를 바꿨다.

"해연은 잘 있어요?"

"우리도 몰라. 누군가 충청도 여승들 많은 어느 절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다 큰 계집이 택한 인생을 누가 어쩌겠어?"



저녁에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날은 술이 당겼다.

리화는 대룡반점을 놔두고 신제주 어느 일식집에서 보자고 했다. 은산이 부친 간호 때문 식당을 임시 닫았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그 생각은 틀렸다. 대룡반점 앞을 지나는 택시 속에서 환히 불 켜놓고 영업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모를 금산과의 조우를 염려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래도 대룡반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잊게 하려고 피한 것인지, 아무튼 그 모든 상황이 자신을 배려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우중충한 거리의 풍경과 대비되게 리화는 노란색 계통의 화사한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그간 서로의 근황에 대한 얘기를 화제로 하다가 용찬이 슬며시 할머니 땅문서 얘기로 화두를 돌렸다.

"너무 고마워, 할머니가 잃어버린 자식 찾은 것처럼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거 내 돈 준 거 아니에요. 죽으면 조상 볼 면목 없다는 할머니 얘기 듣고 보니 안 됐더라구요. 마침 장 씨네 땅 인수한 것 중에 끼어 있어서 아버지한테 졸랐죠. 얼마 안 되는 거였어요."

"리화에겐 하찮은 것이지만 할머니한테는 자신이 묻힐 땅이야."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날 얼마나 귀여워 해 주셨다구요. 옛날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보답이죠 뭐."

"어머니 말씀이 친구처럼 지냈다면서?"

"그래 친구죠. 이제 걱정 없이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리화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막상 리화가 아주 떠난다니 할머니가 많이 섭섭해 하겠는 걸?"

"오빠는 안 섭섭해요?"

"많이 섭섭하지. 그거 리화 책임이야. 매일 시키지도 않은 문병 와서 정들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오빠 가지 말라면 안 갈게요."

용찬은 리화의 당돌한 발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리화가 까르르 웃었다.

"에고, 오빠 얼굴 변하는 것 좀 봐. 농담이에요. 나같이 대륙의 유전자를 타고난 여자가 그냥 살림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집도 한 번 갖다 왔으니 된 거고.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하면서 평생 살았으면 좋겠어요."



리화는 용찬의 눈을 쳐다보며 들릴 듯 말 듯 나직하게 말했다.
"아직도 오빠 사랑해요."
용찬은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덮으며 끌어안았다.




용찬은 리화의 숨김없고 발랄한 성격이 오늘따라 마음에 꽂혔다.

주문한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리화는 배부르다며 젓가락을 놓더니, 소화에는 노래가 최고라며 노래방 가자고 졸랐다. 복분자 3병을 나눠 마셨을 뿐인데 분위기에 취한 건지 용찬은 일어서다가 기우뚱했다.

"그 까짓 술에 취했어요? 우리 성인이 되어 처음 같이 마시는 거잖아요? 호호호."

리화가 신을 신으며 까르르 웃었다.

"왜. 웃는데?"

"옛날 생각나서요. 내가 과외 받을 때 오빤 고등학교 1학년이었죠. 우리 가게에서 술 몰래 훔쳐다 먹은 거 기억나요? 어른들은 이런 걸 왜 먹느냐고. 그래 어른처럼 흉내 내며 간빠이 외치고 물처럼 벌컥 마시더니 목에 걸려서 캑캑거리고, 가슴 탄다고 물 달라고 난리 치고. 호호호. 아이 재밌어라. 아이고 배야."

리화는 우스워 죽겠는 듯 배를 잡고 파안대소했다.

"그래 그런 일 있었지. 그때 초등학생인데 같이 먹고도 리화는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그래서 중국 사람은 아이들도 독한 술을 잘 마신다고 생각했어."

"호호호. 정말 몰랐어요? 그거 오빠 골려주려고 내 잔에는 물을 따랐거든요. 오빠는 빼갈 마시고 난 물을 마셨으니. 아이고 순진하기도 해라. 호호호."

용찬은 약이 올라서 붙잡으려 했으나 리화는 심리적인 거리만큼이나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리화가 아니었다. 인생의 쓴맛과 달콤함을 맛본 그런 노래들을 열창했다. 리화는 물 만난 고기처럼 댄스곡에서 블루스, 발라드 까지 대여섯 곡을 한꺼번에 신청해 놓고 리사이틀 하듯 노래를 불렀다.

특히 '총 맞은 것처럼'을 부를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실감나게 불러서 술기운에 겨운 용찬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용찬은 사양했지만 리화의 거듭된 부탁에 노래 한 곡을 열창하자 리화가 격하게 좋아했다. 노래가 끝나자 리화가 같이 부르자며 노래를 화면에 띄웠다. '사랑했나봐'란 노래의 전주가 나오자 리화는 용찬과 손가락을 마주 잡아 깍지 끼었다.



이별은 만남보다 참 쉬운 건가 봐/ 차갑기만 한 사람

내 맘 다 가져간 걸 왜 알지 못하나/ 보고 싶은 그 사람

사랑했나 봐 잊을 수 없나 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여기까지 불렀을 때 리화는 깍지 꼈던 손을 빼고, 뒤로 가서 용찬의 허리를 껴안고 등에 얼굴을 기댔다.

노래를 끝냈을 때 용찬은 등이 축축함을 느꼈다. 리화가 흘린 눈물이 와이셔츠를 적시고 살갖에 와 닿았다. 용찬은 돌아서서 말없이 리화의 얼굴을 손으로 받쳐 들었다. 리화의 얼굴은 화장이 번져 엉망이었으나 너무 예뻤다. 리화는 용찬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직도 오빠 사랑해요."

용찬은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덮으며 끌어안았다.



가을비는 낙엽들을 조상하듯 추적주적 며칠을 두고 내렸다.

리화를 떠나보냈지만, 용찬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리화의 잔상을 지울 수 없었다. 비어있는 가슴 속으로 해연이 찾아들었다. 해연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가슴 시린 며칠이 지난날 도청 기자실을 막 떠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장종필이라는 이름이 떴다. 드디어 해냈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기자실에 배포된 자료에 의하면 오후 2시에 장석규의 기자회견이 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있다는 통지도 있었다.

휴대 전화를 개방하자마자 종필의 들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용찬아. 됐어. 증거물들 확보 했다고. 지금 어디야?"

"형, 나 지금 사무실 들어가는데 거기서 만나요."

<강준 작가 joon4455@naver.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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