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애월낙조

[김양훈의 한라시론] 애월낙조
  • 입력 : 2019. 09.05(목) 00:00
  • 김도영 수습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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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떠나 사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고향을 그리워할까? 누구나 애틋하게 간직한 추억거리가 두서넛은 있을 테다. 나에겐 저녁노을 지는 구엄리 바닷가가 가장 그립다. 채송화 피던 흙마당과 정군칠 시인의 '애월길'을 떠올리게 하고, 장필순의 노래 '애월낙조'를 생각나게 한다. 이른 봄날의 수선화와 바위틈 순비기 꽃, 모진개 태역밭의 키 작은 해국과 올레를 달리던 싸락눈도 때때로 그리운 동무들이지만, 검바위와 돌빌레 해변의 저녁노을은 그 이상이다.

1970년대 초반, 무전여행이 유행했다. 여름방학에 육지 친구들이 고향 집에 놀러 오곤 했다. 내륙이라 간고등어나 먹으며 자랐을 안동 태생이 놀러 왔다. 폭풍우가 물러간 해 질 녘이었다. 낭간을 내려와 흙마당에 나온 친구는 울담 너머 수평선 위에 물들기 시작한 노을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윽고 절정에 이른 검붉은 노을은 하늘을 태우는 화염이었다.

부엌문 곁 물구덕을 놓아두던 물팡 자리. 얼마 전에 들인 수돗물로 우영에서 따온 저녁거리 송키를 씻던 어머니가 물었다. "자이 무사 저영 햄시니?" 육지 손님의 눈에는 아무리 장엄한 황혼일지라도 어머니에게는 일상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으니, "저 아이 왜 저러냐?"고 묻는 말이었다. 나는 혼자 웃고 말았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즈음, 우리는 마흔을 넘겼다. 중문 베릿내에서 자란 정군칠 시인은 구엄리 바닷가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 그는 '애월길'이란 시를 남겼는데, 해안가 소로길을 마구 파헤치며 아스팔트 포장을 하던 때였다. 동쪽 가문동에서 서쪽으로 애월포구까지, 길이 10㎞의 2차선 애월해안도로는 1989년에 시작해 8년 후인 1997년에 개통했다. 우마가 꾸역꾸역 지나가고 태왁 진 좀녀(潛女)들이 오가던 오붓한 길이 날쌘 자동차 길로 변해버렸다.

달의 뒤꿈치를 끌어당기는 먹구름이/ 가끔 길을 끊어 놓는다/ 길섶의 쑥부쟁이 내음 더욱 짙어지고/ 해안은 열이레 가을달로 마모되어 간다// 구엄지나 중엄, 중엄 지나 신엄의 오르막길/ 사람이 곧잘 떨어져 죽은 흔적이 남아 있는 벼랑에/ 문수가 서로 다른 신발들이/ 드문드문 방지석으로 서 있다// 달이 벼랑에 이르자/ 방지석 사이 뿌리를 두고 피어난 한 무더기 억새/ 자줏빛 더욱 짙어진다// 마을의 불빛들 모두 꺼지고/ 벼랑 위의 멍을 지나 고내로 떠가는 달/ 느슨하게 몸을 풀던 아스팔트의 역청재가 굳어지는 사이/ 또다시 고내 지나 애월로 <정군칠의 '애월길' 전문>

20년 세월이 더 흐른 2014년 동지섣달 끝자락, 소길리 사는 가수 장필순은 새 노래 '애월낙조'를 세상에 내놓았다. 진 주홍빛 구름들로 덮여버린 하늘과 바다… 슬픔은 노을을 좋아한다며 잠잠하게 노래했다.

난개발, 비자림로 확장, 제2공항건설은 제주의 큰 논란거리다. 산과 들과 바다는 쓰레기 천지다. 자본의 개발 물결은 마을 공동체를 괴롭힌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제주 도정은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최근 도정의 책임자인 도지사는 중앙의 정치에 더 관심이 많은 눈치다.

'애월낙조'의 한 구절이다. '누군가가 말했다지 슬픔은 노을을 좋아해.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기억해 그 평화'. 별도리가 없는 것인가? 어스름 초가을 오후 이런저런 생각이 꼬여 구엄리 석양은 가뭇없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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