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7일 서귀포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진보 조향사. 카페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했다. 진선희기자
[한라일보] 1년에 5~6차례 여행차 제주를 오갔던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건 '한 달 살이'였다. 2020년 10월 화장품 회사를 창업해 서울에서 핸드 케어 제품을 직접 제조해 팔았던 그는 제주에 머무는 동안 창업 지원 공고 등을 접했고 선정된 사업들이 구체화되면서 이 섬에서 살아갈 결심을 굳혔다. 2023년 6월, 그는 그렇게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 스스로를 "제주 노지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조향사"라고 말하는 김진보(32)씨다.
"향기는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감각입니다. 여행지의 소중한 순간들이 기념품 몇 개로 휘발되는 것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제주를 찾는 분들에게 단순히 향수를 만드는 것을 넘어 제주에서 마주한 감정을 향과 색으로 표현하며 오래도록 꺼내볼 수 있는 '향기 오브제'를 선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림' 등을 거점 공간으로 조향 스튜디오 '물씬(MOOLSSIN)'을 운영 중이다. '물씬'을 통해 제주 곳곳 저마다 다른 식생과 이야기를 기반으로 빚은 향기를 여행 콘텐츠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숲길을 걷고 나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떠오르는 것들을 색과 향이라는 언어로 옮겨놓는 방식이다. 원도심이나 바닷가 마을에서 진행되는 체험도 다르지 않다. 골목을 누비며 길어올린 사연들을 나만의 향으로 드러내는 여정을 이어간다. 미술관 조향 체험에서는 그곳이 품은 예술 작품을 향기로 풀어낸다. 그러니 그의 손길이 닿는 체험 현장에 똑같은 '굿즈'란 없다.

김진보 조향사는 제주 곳곳 저마다 다른 식생과 이야기를 기반으로 빚은 향기를 여행 콘텐츠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물씬' 제공

조향 체험 프로그램. '물씬' 제공
김 대표는 언젠가 마을마다 간직한 향들을 테마로 지역을 연결해 구석구석 여행할 수 있는 지도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향을 매개로 계절별로 바뀌고 낮과 밤이 다른 제주를 즐겼으면 해서다. "시각 중심의 관광 경험을 후각이라는 더 깊은 감각으로 기억되게 하자"며 '물씬'이란 이름도 붙였다.
'물씬'의 모든 향은 제주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는 그는 "살아 있는 조향 연구실이 바로 제주"라고 했다. 쉼이 필요할 때도 그의 곁엔 자연이 있다. 제주 생활을 시작할 때 기대했던 만큼 자연 안에서 여유를 누릴 틈은 부족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야 하는 날이면 서귀포 자구리 담수욕장에 가서 발을 담그거나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안으로 향한다.
정착 초기엔 지역과 인연을 맺는 일에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청년 창작자 대상 '로컬 파이오니어 스쿨'에 지원해 제주에 있는 선배 창업가들을 만났고 이들 '멘토'는 그에게 제주에 발붙이고 사업을 꾸려갈 힘이 되었다. 서귀포시 남원읍에 있는 로컬 청년커뮤니티인 '브로컬리연구소'를 통해선 비슷한 고민을 가진 청년들과 소통하며 때때로 느꼈던 막막함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부족한 점을 채워갈 수 있었다.

조향 체험 프로그램. '물씬' 제공
"제주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김 대표는 제주에서 여러 사업에 지원하며 로컬 관광 콘텐츠라는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오는 11월에는 감귤박물관 개관 20주년 기획전인 '감귤 오감 체험전'에 참여해 전시장 한편을 감귤꽃 향으로 채울 예정이다. 뻔하지 않은 삶을 꿈꾸는 청년들이라면 '제주 이주'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한다는 그다.
"제주는 전역이 관광특구여서 창의적이고 기발한 콘텐츠와 상품에 목말라 있는 것 같습니다. 창업 지원이 단계적으로 잘된 곳이라 아이디어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제주살이,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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