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할머니가 사는 선흘마을 '뮤지엄'을 꿈꾸다

그림 그리는 할머니가 사는 선흘마을 '뮤지엄'을 꿈꾸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할머니의 예술창고' 전시
할머니 작가 12명 참여… 마을 곳곳에 미술관
할머니 '그림수업'으로 마을에 이는 변화 바람
선흘1리 '뮤지엄 선흘' 향해 마을 만들기 시작
  • 입력 : 2023. 12.10(일) 15:00  수정 : 2023. 12. 12(화) 10:13
  • 김지은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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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이어 올해로 두 번째 '할머니의 예술창고' 전시가 시작된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에서 전시투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김지은기자

[한라일보] 손이 떨려도 그렸다. 오른손이 안 되면 왼손으로 그려냈다. 아침이 오면 꼭 연필과 붓을 들었고, 아들딸 이름까지 사라진 기억을 붙잡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80 넘게 살아온 '역사'가 꺼내졌다.

그림 그리는 '선흘 할머니'들이 다시 일을 냈다. 지난해에 이어 또 한 번의 그림 전시회를 열고 있다. 2021년부터 해마다 이어진 '할머니의 예술창고' 프로그램의 두 번째 전시다. 그 덕에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마을에는 9개의 미술관이 열렸다. 할머니들의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과 창고 등에는 '분농미술관', '마당미술관', '동백미술관', '소막미술관', '그림창고' 등의 간판이 달렸다.

9일 전시 오프닝 행사가 열린 선흘체육관에 모인 그림 그리는 할머니들과 마을 주민들.

|'나 사는 집'에서 건진 삶의 궤적

1년이 지나 다시 선보이는 전시에는 '나 사는 집'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첫 전시인 '할망해방일지'가 그림을 그리며 마음에 해방을 찾았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꺼냈다면, 이번 전시 작품에는 집을 둘러싼 삶의 기록이 진하게 묻어난다. 할머니들의 '그림 선생'인 최소연 작가는 지난 9일 선흘체육관에서 열린 전시 오프닝 인사말에서 "여성 농부이자 어머니었고, 누군가의 아내였던 분들이 '내가 사는 집'에 대한 기록을 시작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면서 "저도 동행하면서 어머니들 삶의 궤적을 쫓아가 봤더니 만만치가 않았다"고 웃었다.

두 번째 전시에는 참여 인원도 늘었다. 올해 새롭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신입생' 4명을 포함해 12명의 할머니 작가들이 작품 200여 점을 내걸었다. 집에 딸린 창고를 분홍색 가득한 '분농미술관'으로 연 부희순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끝까지 완주해 낸 것에 대해 "상당히 기쁘다"고 말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림 하나는 꼭 그린다는 고순자 할머니는 '올레미술관' 앞에서 관람객을 맞으며 "이렇게 그림을 보러 오니 얼마나 반가운가"라며 환히 웃었다.

그림 수업이 3년째 이어지면서 실력도 부쩍 늘었다. 할머니들의 '전시 선생'이자 이번 전시를 함께 기획한 문화예술기획자 장문경 씨는 "처음엔 누가 그림을 볼까 싶어 침대 아래에 집어넣던 삼촌(할머니)들이 올해는 '그림이 막 좋다'며 어마어마하게 많은 그림을 그렸고, 전시 그림 선택도 어려웠다"며 "작년 작품이 드로잉이었다면 올해는 회화다. 작가로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올해 전시에는 '신입생' 4명을 포함해 12명의 할머니가 작가로 참여했다.

|할머니 그림 수업이 일으킨 변화

평균 나이 약 84세, 이들의 '그림 수업'은 할머니 자신을, 주위 사람들을 바꿔 놓고 있다. 늦은 나이에 붓을 드는 게 쑥스러워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던 할머니들이 올해는 보란 듯이 마을체육관에서 그림 수업을 이었다. 가족은 물론 마을 주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할머니들의 전시 첫날 풍경도 떠들썩한 동네잔치 같았다. 주민들은 마실가듯 마을 곳곳 미술관을 둘러보며 축하를 전했고, 가족들은 미술관으로 변한 할머니들의 집, 창고 등에 응원 현수막을 걸거나 따뜻한 차와 떡을 준비해 관람객을 반겼다. 올레미술관에서 만난 순자 할머니의 막내며느리 조금해 씨는 "3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우울해 하셨다"며 "그림을 그리면서 원래 밝았던 성격을 찾고 즐겁고 건강하게 사시는 것 같아 걱정을 덜었다"고 말했다.

부희순 할머니가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분농미술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 전시 오프닝 행사의 드레스 코드는 '핑크'. 할머니의 분홍색 털모자는 딸이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직접 만들었다.

오가자 할머니의 '그림창고'에 달린 가족들의 응원 현수막.

할머니들의 그림 수업은 마을 전체에 변화의 바람이 되고 있다. 선흘1리(이장 부상철)는 '세대를 아우르는 미술관마을, 뮤지엄 선흘'을 선언하고 새롭게 출발할 채비를 하고 있다. 올해 '2024년도 제주형 마을만들기 사업'에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내년부터 주민 주도로 기본계획 수립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5년간 20억 원이 투입된다.

오중배 뮤지엄선흘추진위원장은 "이전에도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한 적이 있지만 성과를 이루지 못 했다"며 "어머님의 그림을 원동력으로 전혀 새로운 콘셉트의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치매를 앓고 있는 제 어머니(박경일, 동백미술관)에게도 그림 수업이 '미술치료'가 돼 웃음을 찾아주고 있다"면서 "내년에 우선 기본계획을 만들고 마을미술관, 공동 카페 등을 조성해 장년, 청년층 등 다양한 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선흘마을에 반짝 문을 연 9개 미술관의 지도.

전시회 포스터.

|"할머니가 건네는 메시지를…"

'할머니의 예술창고 2023 - 나 사는 집' 전시는 오는 17일까지 이어진다. 선흘1리와 선흘볍씨마을협동조합, 소셜뮤지엄, 볍씨학교, 제주문화예술재단이 함께 열고 있다. 그림 그리는 강희선, 고순자, 김옥순, 김인자, 박경일, 박인수, 부희순, 오가자, 윤춘자, 조수용, 홍태옥, 허계생 할머니와 '그림 선생' 최소연 씨가 작가로 참여했다.

전시 기간 반짝 문을 여는 9개의 미술관은 '그림작업장'인 선흘체육관(선흘동2길 31)을 중심으로 마을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만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전시 기간 중 금요일과 토요일, 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는 마을 해설사, 주민들이 안내하는 무료 전시투어도 진행된다.

"이번 전시의 한 섹션이 베개 이야기다. 삼촌들의 공간에 가면 베개 작품 앞에 살짝 기대어 볼 수 있다. 할머니가 쉬라고 하는 평안의 메시지, 축복의 메시지를 받아 가시길 바란다." '그림 선생' 최소연 씨가 전시 초대장처럼 건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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