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블스'로 뜬 은혜씨, 장애인 성공담? 진짜 봐야 할 건…

'우블스'로 뜬 은혜씨, 장애인 성공담? 진짜 봐야 할 건…
배우이자 작가인 발달장애인 정은혜 씨와 엄마 장차현실 씨
지난 15일 열린 '2022년 하반기 도민 인권 아카데미' 무대에
한라일보와의 인터뷰서 '발달장애인 예술노동' 지원 등 강조
  • 입력 : 2022. 10.16(일) 10:40
  •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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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이자 작가인 발달장애인 정은혜 씨가 엄마 장차현실 씨와 함께 지난 15일 제주문학관에서 열린 '2022년도 하반기 도민 인권 아카데미'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상국기자

[한라일보] "안녕하세요. '니얼굴' 작가 정은혜입니다." 지난 15일 제주문학관에서 제주도 주최·한국지역혁신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2022년도 하반기 도민 인권 아카데미' 무대에 오른 은혜 씨가 인사를 건넸다. 만화가이자 엄마 장차현실 씨가 함께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강연에서 이 둘은 '제 꿈은 다 이뤄졌어요'라는 글로 시작한 발표 화면을 사이에 두고 '발달장애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은혜 씨는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제주에서 찍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다운증후군인 쌍둥이 언니 '영희'를 연기하며 얼굴을 알렸다. 현실 속 은혜씨도 다운증후군을 가진 발달장애인이다.

그는 배우이기 전에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린 작가다. 국내 한 플리마켓에 '니얼굴'이란 부스를 열고 세상과 소통해 왔다. 이런 은혜 씨의 삶은 올해 6월 개봉한 영화 '니얼굴'에 담겼다.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찍고 엄마 장차현실 씨가 제작을 맡았다. 은혜 씨는 강연 전날인 지난 14일 제주시소통협력센터에서 열린 '니얼굴' 무료 상영회에서 제주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상영회에서 이어진 강연의 중심에도 은혜 씨가 있었다. 그가 그림이라는 재능으로 사회에 한 발 내딛은 일과 드라마를 통해 연기에 도전한 과정 등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전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장차현실 씨는 이날 강연의 끝에 "재능 있는 발달장애인의 성공담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강연을 다니는 것은) 이 사회 속에서 발달장애인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고, 그것이 저희 세 사람이 가진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며 발달장애인의 '예술노동'을 인정하는 사회를 향한 바람을 꺼내놨다.

지난 15일 열린 '2022년도 하반기 도민 인권 아카데미'에서 말하고 있는 정은혜 씨.

|엄마도 뒤늦게 발견한 재능… "고정관념 알게 돼"

"엄마가 깜짝 놀랐죠." 은혜 씨의 말대로 장차현실 씨는 그의 재능을 발견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2013년 2월 27일, 은혜 씨가 잡지 속 향수 광고를 보고 그린 그림 한 장이었다. 학령기를 지나 스무살이 되자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며 퇴행에 시선 강박증, 조현병까지 겪던 은혜 씨가 엄마의 화실에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그의 곁에서 화실 청소 등을 소일거리 삼으라고 부른 거였지만 은혜 씨는 빈자리가 생길 때면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애들이 그림을 잘 그리니까, 샘이 나 가지고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은혜 씨가 말했다.

장차현실 씨는 그때 자신의 "고정관념을 알게 됐다"고 했다.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엄마인 척했지만 은혜를 장애인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도 은혜한테 재능이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동안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교육을 더 하고 치료를 더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죠. 온전히 비장애인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죠. 은혜가 가지고 있는 힘과 삶의 취향,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처럼 개인의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거예요."

|은혜 씨, 그림으로 세상에 서다… '만남의 기록'

그림이라는 재능을 발견했지만 은혜 씨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화실에 나오기 전에 집에 혼자 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때 장차현실 씨의 눈에 들어온 게, 사는 곳과 가까운 북한강변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이었다. "2016년 8월 23일." 은혜씨가 정확히 기억하는 이 날짜는 200명 넘는 셀러(판매자)가 참여하는 경기도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 은혜 씨가 '니얼굴'이라는 부스를 연 날이다.

은혜 씨는 "만나는 순간을 그린다"고 했다. 그가 리버마켓에서 만난 사람을 그리고 그 위에 날짜를 쓰는 걸 빼놓지 않는 것도 만남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은혜 씨가 1장에 5000원을 받고 그린 캐리커처는 '서비스'가 없어도 인기를 얻었다. 장차현실 씨는 "보통 캐릭커처를 그릴 땐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최대한 예쁘게 그리는데 은혜 작가는 서비스가 없다"며 웃었다. "지금은 약간의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주름을 적게 그리든가 하기도 해요. 그런데 초기에만 해도 광대뼈가 나오면 더 튀어나오게 그리고, 환하게 웃을 때 보이는 이는 쏟아지는 것처럼 부각해 그렸어요. 그런데도 그런 그림을 일반 대중이 선호한다는 게 놀라웠어요. 사람들이 자신을 예쁘게 그려주는 것보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그림을 원한다는 거였죠."

지난 15일 열린 '2022년도 하반기 도민 인권 아카데미'에서 말하고 있는 장차현실 씨.

|"그림으로 소통하려는 의지에 감동"… 영화 '니얼굴'의 탄생

은혜 씨에게 그림은 단순한 '그리기'가 아니었다.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이었다. 장차현실 씨는 "사람들이 와서 '예쁘게 그려달라'고 하면 은혜 작가는 '원래 예쁜데요. 뭘' 이렇게 말한다"며 "너무 당연한 일이다. 특별한 외모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온 은혜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정말 다 예쁜 거다. (그림을 그리며) 그런 마음들을 주고 받게 됐다"고 했다. 엄마의 이 말에 은혜 씨는 이날 강연 참가자에게 시선을 두며 "지금도 모두가 아름답고 멋있고 인상깊다"며 웃음을 띠었다.

그에게 그림은 사람들과 같은 시선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장애인 은혜가 아니라 자신을 그려주는 작가로서 바라봐 줬어요. 그런 존중하는 눈빛을 지금까지 4000개 넘게 받은 거죠. 그러면서 틱이나 시선 강박증이 없어지고 조현병이 나아졌습니다." (장차현실 씨)

야외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이다 보니 여름에는 찜통 같은 더위를, 겨울엔 칼바람을 견뎌야 했지만 은혜 씨는 매 주말이면 거르지 않고 집을 나섰다. 마켓이 끝나기 전까진 집에 돌아가자는 얘기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이날 강연장을 함께 찾은 아버지이자 영화감독인 서동일 씨는 "은혜가 그림을 꾸역꾸역, 한 장 한 장 그려내며 사람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감동을 줬다"고 했다. 처음에는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짜증도 냈다"는 서 감독은 그때부터 은혜 씨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은혜도 살고 싶구나,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싶구나, 언어적 소통은 원만하지 않지만 그림으로 자기의 의지와 생각을 표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자신감을 찾고 아티스트로 바뀌어 가고 있었지요. 감독들이 찾는 '세상에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바로 제 곁에 있었던 겁니다. 딸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림 그리는 과정을 열심히 기록했습니다." 영화 '니얼굴'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난 15일 제주문학관에서 제주도 주최·(사)한국지역혁신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2022년도 하반기 도민 인권 아카데미'.

|"발달장애인 예술노동 인정 받길… 사회 역할 중요"

은혜 씨는 요즘 웬만한 스타 못지 않다. 전국 각지에서 은혜 씨를 만나고 싶어하고 강연, 전시회 등의 일정도 이어진다. 장애를 딛고 '성공'했다고 할 법하지만 은혜 씨와 가족에게 이는 결과가 아닌 또 다른 과정인 듯했다. 장차현실 씨는 강연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이유로 "지역에서부터 발달장애인들의 예술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열어 가는지 실현해 보고 싶다"고 했다. 발달장애인들의 예술노동이 노동으로서 제대로 인정 받고, 이를 통해 한 시민으로 자립해 살아가는 존재가 됐으면 하는 희망 섞인 계획이다.

그는 강연 이후 한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장차현실 씨는 "서울, 경기 등처럼 지자체가 예술적 재능이 있는 발달장애인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 예산을 만들면 된다"며 "이런 시작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발달장애인들은 그림 그리기, 글쓰기, 음악 등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하고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만, 우리처럼 언어적 소통으로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설 자리가 없다"면서 "발달장애인이 외치고 있는 예술은 '살고 싶어요'라는 다른 소리로 들린다.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지고 인식이 자리잡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은혜 씨는 자신처럼 그림 그리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제주도내 발달장애인에게 한마디 건넸다. "너무 잘 그리는 건 아니고, 그냥 저처럼 자신감 있고, 또 음… 훌륭하게 하면 좋겠어요." 조금 서툴고 느리지만 깊이 생각하듯 이 말을 뱉었다. 은혜 씨가 그림으로 세상에 서서 '나'를 찾은 것처럼, 자신과 같이 장애를 겪는 이들도 '자신'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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