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 (80)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 (80)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
비옥한 땅 '조물케'… 여의주가 변했다는 구룡석 전설 간직
  • 입력 : 2016. 03.15(화)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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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갯바위들이 설치미술품처럼 해안조간대를 따라 펼쳐진 바닷가(위)와 전국 최초로 기계화 영농을 위해 경지정리를 했다는 구름드르와 마을풍경(아래).

옛 지명은 마을 생명수인 용천수와 연관 있어
해녀 사망사고 빈번하자 고종 때 수원리로 개명
전형적 반농반어촌 경관 활용 마을 수익 구상



섬 제주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면 하염없이 부러워했던 흙을 가지고 있는 마을. 전통적으로 한 마지기의 농토를 150평으로 계산했지만 수원리의 밭은 120평. 그만큼 소출이 좋은 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농업생산성을 기반으로 번창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제주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28k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귀덕2리, 서쪽으로는 한수리, 남쪽으로는 대림리와 이웃하고 있다. 1972년 전국 최초로 기계화 영농을 위한 경지 작업을 마을공동체정신에 입각하여 이뤄낸 진취적인 마을. 38개의 성씨를 가진 419세대 10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김무종(73) 어르신이 전하는 마을의 역사는 이렇다. "이 마을(수원리와 한수리가 분리되기 전)에 처음 거주한 사람은 경주김씨 좌도지관(左都知官) 김검용(金儉龍)의 8대손(代孫)인 김경의(金景義)가 1580년(선조 13)에 지금은 한수리가 되어버린 당시 속칭 '대섬집터'에 거주하며 奬仕郞訓導(장사랑훈도)를 지내면서 마을의 발상 시조로 보고 있습니다." 옛 이름은 조물케라고 불러왔다. 조물케란 뜻은 설촌 이후 마을 사람들이 식수와 생활용수로 쓰던 용천수(큰물, 생이물, 돈지물, 개물, 솔패기물, 엉물, 쇠물, 중이물, 모시물 그리고 가좌외의 두 개의 엉물등 11개소)가 만조 때에는 전부 바닷물 속에 잠기는 까닭에 조물케라 하였으며 한자로 풀어서 잠수포(潛水浦)라고 하였다. 그러나 넓은 해안지대 공동어장 189.6ha에서 생업을 영위하는 해녀들의 사망사고가 빈번함으로 인해 서기 1882년(고종 19) 마을 유지들이 협의하여 수원리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원리(洙源里)는 공자가 제자들을 훈육하던 곳의 지명을 가져온 것이다. 그만큼 마을 이름 개명 당시 유교적 가치관이 깊이 뿌리내렸던 마을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귀덕 쪽에서 보면 길게 뻗은 동산이 완만하게 뻗어있어 개미도 기어오르기 힘들다하여 붙여진 일명 개엄지머를이라고 하며, 한수리 쪽에서 보면 암반위에 성곽을 두른 듯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일명 빌레모를이라고 오래전에 불리기도 했다. 자연마을은 일주도로변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면서 웃동네, 중동네, 알동네, 안동네, 앞동네, 큰물동네와 1979년 정부의 시책에 의해 1차취락 구조개선사업으로 생긴 수전동과 1980년 2차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생긴 신성동 및 본동과 1km 동쪽에 위치한, 지금은 용운동으로 이름을 바꾼 가좌외가 있다.

독특한 스토리텔링 자원이 있다. 마을 상징석과 관련된 전설이 그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해안가에 속칭 '남수왓' 동쪽 용구못에는 용의 새끼 아홉 마리가 살았다고 한다. 이들이 승천하려면 꼭 여의주를 물어야 되는데, 여의주가 하나 밖에 없어서 새끼용들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 다투어 하늘과 땅이 혼탁해지는 등 마을 사람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싸움을 멈추게 해달라고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냈다. 하늘이 감복하여 그 여의주를 돌로 변하게 해버리니 새끼용들은 아무도 여의주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여의주가 변한 돌은 석수굴 앞 바다에 떨어졌고 이 돌을 마을 사람들은 구룡석이라고 한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마을 상징석이 해안도로 구룡소공원에 자리해 있다. 구에 가까운 형태의 큰 돌을 가지고 지어낸 이야기로 보이지만 참으로 지혜로운 훈육적 가치가 엿보인다. 자식들의 재산싸움을 경계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과도한 해석일까? 구룡소공원에서 평수포구까지 걸어가며 비양도를 본다. 비양도 넘어 하늘에 위치한 태양 빛이 바다에 부서지면 비양도는 빛 위에 떠있는 섬이 된다. 바다가 사라진 듯 작은 환상이 일어난다.

김영길 이장

김영길(49) 이장이 밝히는 수원리의 포부는 이렇다. "전형적인 반농반어촌인 저희 마을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자산은 광활한 구름드르의 경관적 가치와 바다 사이에 있는 해안도로 여건을 활용하여 마을수익사업을 할 수 있어야 발전의 발판이 될 것입니다. 긴 해안선과 넓은 경지면적을 강점으로 하는 사업과 해상풍력이 만난다면 탁 트인 느낌을 맛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에게 호감 높은 관광지로 변모할 것입니다. 바닷가 체험 등 제공 할 수 있는 것들이 풍부하니까요." 마을 해녀 65명 중 막내가 어촌계장이라고 했다. "물에 드는 해녀도 있지만 못 드는 해녀회원들도 있습니다. 행정에서 지원해주면 해녀식당을 해서 그 수익을 모아 해녀들 노후를 보낼 복지회관을 건립하고 싶습니다." 김복연(62) 어촌계장의 말이다. 평생을 이어온 자립정신이 아직도 육화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수원리에 25년 전에 시집왔다는 이향례(49)부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주민 대부분이 넓은 면적의 밭을 경작하거나 하우스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창고를 지어서 다양한 농기계를 농번기 수요에 맞게 구비하여 마을회에서 빌려주는 장치를 만들지 않으면 농업인구 노령화 시대에 항상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업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농기계화를 명분으로 아름다운 밭담들을 허물고 바둑판처럼 경작지를 바꿨다면 이에 상응하는 행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국가시책을 따라 효율성을 획득하였지만 기계화의 길을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수원리 며느리의 지적이었다. 가슴 아픈 대목이다.

강정훈(42)청년회장이 72세가 되는 2046년, 수원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분명하게 레저산업 방향으로 고품격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유입인구가 많은 마을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지역 특성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 마을 발전의 향방이 바뀔 것이다. 수원리의 미래는 밝다. 구름드르 농로처럼 탄탄대로가 될 것이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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