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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끼니를 위하여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1. 11.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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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휴가'.

휴가라는 이음절의 단어는 강력하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리고 계획을 세우는 모든 순간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지금 나의 고단한 일상을 벗어나는 시간, 처리해야 할 일들과 지켜야 할 약속들을 유예할 수 있는 합의인 동시에 허락인 휴가. 학창 시절의 방학, 군생활 중의 휴가, 직장생활에서의 바캉스는 늘 소비의 시간에 가까웠다. 맘 먹고 시간을 썼고 참아왔던 욕망들을 해갈했고 아껴두었던 돈을 쓰며 나를 위해 이런 시간은 꼭 필요하다는 자기 긍정을 반복했다. '휴가'라는 제목의 영화를 내용을 모르고 접했을 때는 그런 시간을 담아낸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도시의 빌딩 숲을 향해 오르는 이의 뒷모습이 담긴 영화의 포스터는 제목과는 좀 다른 뉘앙스였다. 여행용 캐리어 대신 짊어진 배낭과 손에 들린 가방, 휴양을 떠나는 옷차림이 아닌 작업복 차림을 한 남자가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덤덤한 문구 아래 자리한 포스터는 그의 휴가가 내가 생각했던 휴가와는 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휴가'라는 단어의 의미가 하나 더 추가됐다. 그의 등에 짊어진 짐처럼 묵직한 그 단어의 의미를 나는 마음에 새겼다.

 해고 5년 차의 노동자 재복은 길 위에 지은 천막에서 1882일째 농성 중이다. 이미 오래전에 직장을 잃었지만 그는 쉬지 않고 매일을 노동자로 살아간다. 함께 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들을 위해 밥을 지어 먹이고 세상을 향한 대답 없는 외침을 계속한다. 지리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해고 복직 소송에서 패소한 재복은 열흘 간의 휴가를 얻게 된다. 길을 떠나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의 휴가는 꽉 막힌 주방 개수대를 치우고 냉장고를 닦아내는 일로 시작된다. 두 딸을 키우는 싱글 대디인 그에게 일터에서의 휴가는 집이라는 또 다른 터전을 돌보는 다급한 시간일 뿐이다. 딸의 대학 예치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시로 구한 일터에서 그는 자신의 휴가를 온전히 사용한다. 노동의 가치가 금전적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소중한 하루가 어렵사리 흘러가고 그곳에서 만난 아들 뻘의 노동자의 삶이 재복의 시야에 들어온다. 외면하는 법을 모르는 재복에게 타인의 처지는 그저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공평하다. 잠을 자고 일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며 그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끼니를 챙겨 먹는다. 영화 '휴가'는 '다른 건 몰라도 밥을 먹어야 해, 곡기를 집어넣어야 기운이 난다'라던 말들이 얼마나 간곡한 부탁인지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 '휴가' 속에는 밥을 차리고 밥을 먹이고 심지어 밥을 나르는 장면들이 연이어 보여진다. 무엇 하나 수월하지 않은 모든 고비 앞에서도 재복은 묵묵히 끼니를 만들어 스스로를 먹이고 가족과 동료, 타인들을 챙긴다. 큰 실패와 작은 재난들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찌개를 끓이고 소시지를 볶고 국을 데워내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크고 외롭고 단단하게 느껴졌는지 나는 그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의 나를 미워하지 않고 오늘의 나를 책망하지 않으며 내일의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끼니의 힘을 믿는 재복을 보며 나는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게 됐다. 누군가에게는 미련한 사람일 수도 스스로에게는 가혹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 끼니의 시간을 미루지 않은 재복의 성실함은 일면 경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영화의 시작에서 밥을 짓던 재복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지은 밥을 하늘로 올려 보낸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재복이 고공 농성을 하는 동료를 위해 빨간 보자기에 정성껏 싸맨 한 끼를 건넬 때, 그는 어쩌면 여전히 멈추지 않고 뛰고 있는 연대의 심장을 전달할 것일지도 모른다.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야'라는 말이 자조적으로 들릴 때가 있었다. 그저 생계를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이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나는 왜 더 벌지 못하고 남은 왜 더 버는지가 숨 막히도록 우울한 순간도 있었다. 생계를 위한다는 말이 가끔은 너무 구차한 것 같아서 한 끼를 먹는 순간이 고역인 날들도 적지 않았다. '휴가'는 그 먹고사니즘이 얼마나 귀한 가치인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더 나은 한 끼를 만들어 나누는 마음은 결국 더 나은 삶을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일 것이다. 고단한 하루를 수많은 고민으로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얼굴 앞에 와닿는 더운 숨결이, 아무도 내 편인 것 같지 않아 절망하는 이들의 앞에 놓인 한 끼의 위로가 이 영화 속에 있다. 더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의 한술을 함께 뜬다면 좋겠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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