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와 문학] (48)홍성운 시 '마라도 쇠북소리'

[제주바다와 문학] (48)홍성운 시 '마라도 쇠북소리'
"섬의 노을 앞에 가만히 고수가 되라"
  • 입력 : 2020. 04.10(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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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마라도. 홍성운 시인은 '마라도 쇠북소리'를 통해 생명 깃든 섬의 자연이 내는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라고 노래했다.

아기업개당의 전설 깃든 곳
작고 여린 존재들의 생명력
그저 자연의 울림에 집중을


1980년대 초 제주학 연구자들이 그 섬에서 인상적으로 마주한 건 바람이었다. 제주는 바람이 심한 지역이지만 특히 그 섬에서 벌어지는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와 돌풍은 생업에까지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거였다. 섬을 개척할 무렵부터 이곳을 스치는 강풍은 토양을 침식하고 해수를 날라 토질을 척박하게 만들고 농업에 커다란 지장을 불러왔다고 소개했다. 제주학회가 내는 '제주도연구' 제1집(1984)에 실린 이기욱의 '도서와 도서민-마라도'의 한 대목이다.

대한민국 최남단으로 우리 영토의 끝이면서 시작인 마라도. 제주 홍성운 시인은 이 섬에서 생명력을 본다. 1999년 제주작가회의가 펴낸 '제주작가' 창간호에 발표했고 백광익 작가의 그림이 더해진 동명의 시화집(2007) 표제시로 묶였던 '마라도 쇠북소리'다.

'민들레 홀씨 날려 넉넉해진 섬이 있다. 시인묵객이 다 우려내 비밀 한 점 없지만 한여름 별빛을 품어 말갛게 깨어 있다'로 시작되는 시는 그 섬에 깃든 작고 여린 것들로 시야를 넓혀간다. 땅을 기어 머리를 들지 않는 잔디, 습성대로 낮게낮게 발을 딛는 찔레가 얼굴을 내민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순비기처럼 질긴 목숨을 이어가는 존재들이 살아가는 이 섬엔 전설이 있다. 동글동글 해안가의 돌로 둥그렇게 에워싼 마라도 아기업개당이 품은 사연이다. 시에서는 늙은 해녀들이 불을 켜는 '처녀당'으로 묘사됐다.

마라도에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엔 전복과 소라 등 해산물이 더 풍부했다. 어느날 모슬포에서 배를 타고 마라도에 와서 작업을 하던 일행 중에 상군 해녀와 뱃사공이 같은 꿈을 꾼다. 그 꿈에 무사히 바다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려면 '아기업개'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예언이 나왔다. 결국 여자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훗날 이 여자를 위해 해녀들은 처녀당을 지었고 1년에 한번 당제를 지낸다. 마라도 해녀들은 이 전설을 실제 있었던 일로 듣고 자랐다고 했다. '애기당'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할망당'이 되었다.

시인은 이 섬에서 '억새는 고집스레 묵은 꽃대 세우고 해풍에 마음 푸는 얼굴 환한 소나무 고개를 들 때마다 삭정이가 부러진다'고 노래했다. 섬을 지탱하는 크나큰 자연 앞에선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갈 수 밖에 없으리라.

'이제 내방객은 가만히 고수가 되라 둥그런 수평선의 큰 북 같은 노을 앞에, 무시로 섬을 때려라/ 아, 마라도 쇠북소리'로 끝을 맺는 시는 섬에 가거든 자연이 빚는 울림에 귀기울이라고 한다. '가만히' 고수가 되라는 건 사방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섬에 부딪히며 빚는 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어도 된다는 말이겠다. 이 땅에선 그동안 자연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맘대로 그것들을 휘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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