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작]끝없는 밤

[소설 당선작]끝없는 밤
김선희
  • 입력 : 2017. 01.03(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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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햇빛이 필요한데, 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밤은 계속되고 있었다.
예전에 '끝없는 밤'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약을 타러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다. 밤이 이렇게 새카만데 아이는 엄마 약을 타러 이 어둠속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갔다. 창밖으로 사라져가는 그 뒷모습을 잠깐 보았을 뿐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울고 싶을 땐 콩을 고르면 된다. 그 노랗고 동글동글한 것들은 세상 뒷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눈물방울이다. 썩어버린 방울은 골라 내버린다. 어떤 흠집도 없는 순수한 결정체만을 남겨둔다. 아이를 어둠속으로 내몰고 밤새도록 콩을 골랐다. 그 이후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낮이 찾아오지 않는다.

새카만 밤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창을 닦았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혹시 아이가 돌아와 창밖에 섰을 때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봐 겁이 났다. 먼저 흠뻑 젖은 걸레로 꼼꼼히 닦아내고 다시 마른 걸레로 뽀득 뽀득 소리 나게 닦았다. 13장의 창이 맑아졌을 때는 이미 아이가 약을 사러 나간 지 48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동안 나는 5만 개의 콩을 고르고 13개의 창을 닦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내 몸의 수분이, 염분이, 지방이, 단백질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무시무시한 태양빛 아래의 허수아비처럼 무기력하고 부서질 듯 바짝 말랐다.

TV를 켰다. 특별 생방송으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동남아 지역의 바다 밑에서 진도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동남아 곳곳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아무런 대책 없이 썩어 들어갈 시체들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산산조각 난 거리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유령처럼 걸어 다니거나 널려 있었다. 나는 슬퍼져서 다시 콩을 골랐다. 골라도 골라도 콩은 사라지지 않았다.

방 안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많은 침묵이 쌓여갔다. 시계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달력은 1부터 31까지의 숫자를 뻣뻣하게 정렬시킨 채 방안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TV에서는 여전히 대재앙이라는 표제를 단 채 참담한 화면이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아나운서는 침통한 목소리로 고개를 떨궜다.

문득 햇빛이 필요한데, 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밤은 계속되고 있었다. 예전에 '끝없는 밤'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눈부셨고 사람들은 밝은 색 옷을 입고 걸어 다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백인이었지만 주인공 남녀 두 사람만은 흑인이었다. 계속되는 낮 속에서 두 사람은 유독 눈에 띄었고 시종일관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 접시를 들춰보고 키스를 하다가도 상대방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사라졌다. 남자는 괴로워하며 여전히 무언가를 찾았다. 이제 남자가 찾고 있는 것이 여자인지 다른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그러다 남자도 사라졌다. 영화의 마지막은 환한 태양, 낮이 계속되는 거리에 백인들이 밝게 웃으며 밝은 옷을 입고 분주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10분 동안 보여 주었다.

TV가 특별생방송으로 방류하는 이미지가 가쁘게 토해 놓는 입김으로 창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다시한번 48시간을 창 닦는데 쓰고 TV를 끌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혼자 생각하기에 밤은 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었다. 아이와 보내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돌림노래처럼 계속 반복되었다. 잉여의 시간도 역시 진심으로 죽음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종말을 아름다움으로 대치시키는 것은 어떻게든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절대에 대한 헌사일까, 아니면 극도의 공포일까. 영화 '빛'이 그려 놓은 그 헌사 혹은 공포는 너무 아름다워서 이후 한동안 나를 혼란에 빠트렸었다.

밤은 꼬리를 물고 원을 그리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불렀다. 
“Broken Heart". 


삽화=화가 고예현

영화 '빛'은 더위, 가뭄, 추위, 홍수 네 개의 재난이 차례차례 지구를 덮쳐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미장센도 뛰어났지만 그 충격적인 아름다움은 역시 표현속도의 역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홍수로 거대한 물이 마을이며 도시를 휩쓸어가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의 영상이라면 엄청난 해일이 저 끝에서부터 한입에 집어 삼키듯 급격하게 휘몰아치는 물을 보여주었겠지만 '빛'에서의 해일은 거대하고 느릿한 군무였다. 원래는 따로따로였던 작고 매끄러운 물방울들이 사람들이 움직이는 활기찬 도시 위에서 서서히 합쳐지는 모습부터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한다기보다 오히려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씩 합쳐진 물은 크고 작은 덩어리가 되어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 냈는데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은 인류 역사상 주요한 사건들을 집단으로 형상화하거나 히틀러나 프로이트, 고흐로 추정되는 유명인들을 만들어냈다. 그 모든 것들이 매우 느린 속도로 모였다 흩어지고 다시 모여 더 큰 물덩이가 되어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질주하는 자동차가 감히 꿈꾸지 못하는 아니 꿈꾸지 않는 아득히 먼 허공위에서 물은 고유의 느릿한 율동으로 조금씩 더 거대해졌다. 매우 투명해서 저 지상의 알갱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대로 비춰 보였는데, 햇빛이 물에 닿을 때마다 무수한 반짝임이 터질 듯 부풀었다가 다시 새로운 반짝임으로 되살아나며 눈부신 포말로 비춰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감싸 안았다. …… 그래서 땅 위의 모든 것들은 대단히 아름다워 보였지만 사실 그건 피안의 빛으로 덮쳐지고 있던 거였다.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죽음에 대한 달콤한 동경으로 가슴을 꽉 채우고 영화관을 나와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서 자살을 선택했다.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그저 가십거리로 다룰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것이다. 저명한 영화평론가들이 영화를 제대로 분석하기도 전에 이미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각 종교단체와 사회단체들이 "죽음을 터무니없이 미화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선 가운데 일부 소규모의 비영리 단체와 개봉 이후 영화의 영향으로 폭발적으로 일어난 자살을 이르는 신조어인 'Sweet Dream'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인간은 완전한 전체로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명한 권리가 있으므로 우리의 죽음을 범죄취급하지 말라"고 맞대응 했다. 그들은 또 "인간이 온전한 하나의 개체가 아닌 초개체가 되어버린 오늘날 죽음이야 말로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최고의 권리"라며 일순 불온해 보이는 사상을 내비쳤다.

나는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지진 발생 당시 누군가가 캠코더로 찍은 거친 영상이 여과 없이 방송되고 있었다. 영화 '빛'에서 보았던 맑고 투명한 물 대신 강한 돌풍을 동반한 시퍼렇고 싯누런 괴물 같은 물덩이가 순식간에 경계를 넘어서 마을을 덮치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 사람과 함께 휩쓸어 어딘가에 내동댕이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죽음을 선택할 권리'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아도 될 권리'에 대해 생각했다.

일어서서 고개를 드니 천장이 낮아져 있었다. 아이의 키는 조금 있으면 나를 훌쩍 넘을 것이었다.

부엌 식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약봉지를 들춰 보니 약이 하루치 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는 나를 위해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처방전을 끊어왔다. 끊어온 처방전을 들고 보건소에 가서 한 달 치의 약을 타 오는 것도 아이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내가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물어보는 것도 아이의 몫이었다. 허름하게 구겨진 낡은 약 봉투에 달랑 하루치의 약 두 봉지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악스럽게 봉투에 손을 집어넣어 약을 한 봉지 꺼내 한 입에 탁 털어 넣고 물도 없이 꿀꺽 삼켜 버렸다. 삶에 대한 지지부진한 잔향이 목구멍에 고스란히 남아 썼다.

문득,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니 밖은 여전히 새카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창을 조금 열어볼까 하고 창문을 밀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창문 손잡이를 붙들고 괜히 용을 쓰다 단념하고 창문 밑 벽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벽과 맞닿은 등에서 느리게 회전하는 어둠의 감탕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밤은 꼬리를 물고 원을 그리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불렀다. "Broken Heart".



내가 살던 새카만 / 하늘에 달린 조그만 별 / 반짝반짝반짝 / 그 뾰족한 끝에 / 달린 새카만 하늘 / 내가 살던 새카만 / 하늘에 달린 조그만 별 / 반들반들반들 / 그 매끈한 몸에 / 살던 새카만 하늘 / 아직은 괜찮은 거야 / 내가 살던 새카만 / 하늘에 달린 조그만 별



계속 노래를 불렀다. "기우제".



혼날까봐 말할래 / 기우제를 지냈어 / 하루종일 비가오면 / 일등을 한다길래 / 혼날까봐 말할래 / 기우제를 지냈어 / 하루종일 쏟아지면 / 로또가 된다길래 / 혼날까봐 말할래 / 기우제를 지냈어 / 하루종일 퍼부우면 / 숙취가 없다길래 / 혼날까봐 말할래 / 기우제를 지냈어 / 하루종일 내려오면 / 양말을 준다길래 / 혼날까봐 말할래 / 기우제를 지냈어 / 하루종일 계속되면 / 네가돌아 온다길래



네가 돌아온다 길래.

노래를 두 곡밖에 부르지 못했는데 벌써 마음이 질퍽질퍽했다. 감정적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선곡에 잘못이 있었다. 아침 약을 미리 먹고 싶었다. 밤이 계속 되면 영원히 아침 약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내가 약 먹는 걸 잊어버리면 버릇없이 화를 냈다. 나는 화내는 아이가 귀여워서 웃었는데 아이는 자기를 무시한다며 또 화를 냈다. 나는 어른한테 함부로 화내는 거 아니라며 아이를 혼냈다. 나는 야단친 아이를 끌어안고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아이와 나는, 영화 '히치하이크 '에서의 젊은이와 강아지 같았다.

비가 쏟아져 내리는 고속도로. 차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다. 도로는 비에 젖어 검게 물든 채 텅 비어 있다. 비가 올 때의 어둑어둑함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카메라는 그 도로를 따라 느린 걸음을 한다. 어느 순간 프레임 왼편 아래쪽에서부터 흰털이 잔뜩 젖은 강아지 한 마리가 털털거리며 앞으로 나간다. 한동안 카메라는 강아지와 보조를 맞추듯 일정하게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 화면 왼편에서 한 젊은 남자가 나타나 강아지를 품에 안아 들고 도로를 걸어간다. 곱슬거리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리고 청바지에 재킷을 걸쳤다. 남자의 앞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강아지를 안고 걷는 젊은이의 뒷모습을 스크린 한켠에 걸어두고 영화는 7, 8분여 동안 씬을 넘기지 않는다. 이 영화의 오프닝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 그 순간! 스크린에 불이 붙는다. 그러니까 영화 밖 실제 스크린 막의 오른쪽 끝에서부터 불이 붙어 순식간에 막을 태워버리고 꺼져 버린다. 어떤 장치를 했는지 모르지만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갑자기 영상이 사라지자 관객들은 1분여 동안 아무도 꼼짝할 수 없었을 만큼 깜짝 놀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들린 말이지만 순간적으로 호흡곤란을 일으킨 사람도 있고, 패닉상태에 빠져 울음을 터트린 사람도 있고, 내가 지금 사후체험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의심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사라진 젊은이와 강아지에 대해 억제할 수 없는 그리움이 끓어올랐다. 사람들은 잠깐 동안 그 격렬한 감정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이 단계에서도 눈물을 줄줄 흘린 사람이 있고,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을 한 사람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너무 꽉 쥐어 손바닥에서 피가 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서서히 그 감정들이 사라져갔다. 자신을 가득 채웠던 부글부글한 감정들이 모두 사라지고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밝아져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는 순간,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스크린 쪽으로 냅다 집어던지며 엄청나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다수였고, 좀 더 얌전한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웅성웅성 주위 사람들과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또 몇몇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그렇게 흘려보지 못했던 눈물이 자신의 메마른 볼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두었고 일시적이나마 한없이 자유로워진 머릿속으로 자신의 뚜렷한 존재이유를 깨닫거나 존재의 소멸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얻었다. 400명의 관객 중 289명이 환불을 요구했고 영화는 단 1회 상영되었다. 상영회수는 관객의 항의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따지자면 어른인 내가 젊은이 역할일 테고 아이가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 역이겠지만, 밤이 계속되고 계속 깊어지고 진도 9.0이라는 사상초유의 강진에 목이 꺾인 시체들이 거리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시점에서 나는 아무래도 상식적인 판단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스크린을 불태워 버리고도 극장이 바로 불을 켜지 않자 사람들은 빨리 불을 켜라- 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언제나처럼 극장의 좁은 좌석을 모태 삼아 잔뜩 웅크리고 깊숙이 파묻혀 다른 생각을 했다. 왜 저렇게 분노하는지, 화내느라 일그러진 얼굴이 얼마나 추한가를 알고 있는지, 결국 그래서 뭘 얻고 싶은 건지(환불? 킬링타임용 편한 영화? 어두운 극장을 밝힐 전등불? 그것도 아니면 상처받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보상?) 나는 다수의 그늘 밑에 웅크리고 앉아 그들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과격하게 극장 좌석을 발로 걷어차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불이 켜진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 전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영화에 대해 주도권을 잡기를 원했고, 나는 내 눈 두 개를 빼고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 도덕성과 책임감, 상업성과 예술성, 표현력과 주제의식 등등 많은 것들을 - 영화가 내게 제시하는 그대로 흡수하는 완전히 수동적인 관객이라는 것이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을 뿐이었다.

TV에서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자연재해를 하나씩 짚어가며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너무 들어서 자연스런 현상처럼 여겨지는 지구온난화라든지 엘리뇨 현상 같은 환경관련 용어들이 전파를 타고 찌릿찌릿 흘러 나왔다.

삽화=화가 고예현



그런데
내 권태로운 삶은 다 어디 간 거죠?
초콜릿을 먹으면 좋아지는 기분은 다 어디 갔죠?


아이아빠가 그렇게 죽고 나서 세 달쯤 지나 나는 아이와 함께 애 아빠의 고향에 내려갔었다. 어디였던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주위가 온통 산이었고 근처에 제법 깊은 동굴도 있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가솔린 냄새가 코를 찌르는 oo행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이고 달려가며 유랑이라도 떠나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삶은 달걀을 까먹었다. 아이가 달걀노른자만 쏙 빼놓아서 내 손바닥 위에 3개의 달걀노른자를 잠시 올려놓았는데 버스가 흔들리는 사이 흥겨워진 노른자들이 스스로 몸을 굴려 부서지지도 않고 야무지게 좁을 통로를 굴러갔다. 아이는 감탄하여 박수를 쳤다. 자기가 먹어치우지 않아 좋았던 거라고 했다. 앞으로도 달걀노른자는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TV를 보니깐 연예인들이 달걀흰자만 먹어 근육이 울퉁불퉁한 거라며 자기도 지금처럼 흰자만 먹겠다고 제법 굳은 다짐을 했다.

매우니깐 눈 딱 감고 마셔, 사이다 캔 꼭지를 따 아이에게 건네주며 나는 갑자기 강렬한 기시감을 맛보았다. 순간적으로 아이가, 이미 적당한 근육이 잡힌 튼튼한 몸을 가진, 조금 있으면 나에게 프러포즈를 할 동갑내기 남자가 되었다가, 와 사이다네!, 하며 덥석 채가는 작은 손에서부터 다시 아이가 되었다. 기시감도 이 정도면 영매 수준인데. 나는 그리움같이 졸졸졸 밀려드는 아쉬움에 몸을 움츠렸다.

매우니깐 눈 딱 감고 마셔, 라는 말은 예전에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남편은 사이다나 콜라 같은 탄산음료를 맵다고 표현하곤 했다. 음료를 입 안에 흘려 넣었을 때 조그맣고 수많은 물 분자들이 일제히 투다다다 투다다다 기관총을 쏴 대듯 혀와 입천장, 콧속까지 전부 들고 일어나며 느껴지는 그 소란스러움을 남편은 너무 맵다-고 얘기하곤 했다. 한 마디로 남편은 탄산음료를 잘 못 마시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여행길 차 안에선 삶은 달걀- 삶은 달걀엔 사이다-" 하고 멋대로 노래를 지어 부르며 터미널 매점에서 덥석 덥석 주전부리를 집어 들던 남편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 날은 결혼하기 전 처음으로 시부모님께 인사들 드리러 가던 길이어서 나는 화사한 분홍색 투피스에 벚꽃 잎 같이 자잘한 레이스가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즐거운 처녀였다.

벌써 13년 전이구나.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벽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가끔씩 아련한 얼굴로 힐끔 벽장을 쳐다보곤 하는 다른 여자들처럼 나는 그때 입었던 분홍색 투피스를 바구니에 넣어 두고 종종 꺼내어 뚜껑을 열고 햇빛을 비추었다. 그 날 그 옷을 입고 자신의 고향 길에 몸이 가벼운 새처럼 금방 날아갈 듯 서서 햇빛에 동그란 어깨를 곧게 펴고 있던 여자에게 남편은 몇 번이나 정말 예쁘다고 말해 주었었다.

남편의 고향집은 고속버스에서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40분쯤 더 가서 거기서부터 다시 30분쯤 걸어 들어가야 했다.

모든 것이 행복했다. 간간히 누런 흙바람이 흥겨웁게 몰아치던 산 속 오솔길도 행복했고, 모두 우리 산의 아이가 데려온 신부감이 얼마나 이쁜지 보자고 내게 몸을 숙이듯 기울어진 노련하고 완숙한 신록의 압도적인 색채도 행복했고, 아들이 선택한 여자를 흐뭇하게 친딸처럼 보듬어 안던 노부부의 거친 손도 행복했고, 훌쩍훌쩍 눈물을 보이는 제일 친한 친구와 거리낌 없이 큰 소리로 환성을 올리는 신랑의 남자친구들과 시종일관 긴장하여 뻣뻣하게 앉아 계신 양가 부모님을 흥분과 열기로 발그레한 몸을 웨딩드레스에 담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신부의 정신없는 눈동자도 모두, 행복했다.

행복의 수는 명백히 절대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안간 단 하나의 치명적인 불행이 독재자처럼 등장해 모든 것을 전복시켰다. 그 많던 행복들은, 원래 그런 것이 있었다는 존재의 껍데기만 남겨 놓은 채 스스로 경직하여 눈치만 살피다가 앞다투어 서로를 고발하기 시작하면서 예외 없이 모든 것이 불행해졌다.

남편의 참혹한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던 시부모님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사시다 남편이 죽은 지 1년 만에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고의 강수량을 기록한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흙더미에 깔려 아들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돌아가셨다.

TV가 다시 동남아시아 대지진 현장모습을 보도하자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길게 누워 안방TV를 켜고 비디오를 틀었다. 아이가 나가기 전에 빌려다 준 비디오였다. 아이는 남편의 엉뚱한 면만 닮았다. 고집스럽게 달걀노른자를 안 먹는 거라든지 빌려오라고 알려 준 영화제목은 비디오대여점에 가는 길에 깨끗이 잊어버리고 멋대로 다른 영화를 빌려오는 거라든지. 이번엔 따로 정해 주지 않았더니 신나서 뛰어나가서는 고르는 데 아주 힘들었다며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아이가 고른 영화제목은 '먼 산의 나무가 움직일 때'.

처음 테이프의 타이틀을 보았을 때 나는 잠시 중년의 저명한 소설가가 오랜만에 내 놓은 신작소설을 들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문학적인 풍취가 물씬 풍기는 영화제목이라니, 누군가의 견고한 고집이 이루어 낸 쾌거가 아니었을까. 좀 더 대중적으로, 좀 더 팔릴만한 포장이 자본주의를 토대로 만들어지는 현대영화의 최고 덕목 아니던가. 둘째가라면 펑펑 울어버릴 옹고집쟁이 우리 아이가 유레카!를 외치며 이 테이프를 집어 들었을 생각을 하니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아이도 13년 전 엄마가 아빠 손을 잡고 꽃처럼 걷던 그 길을 기억하는 걸까. 모든 풍경이 겉으로는 모르는 척 했지만 슬며시 웃으며 몰래 자신을 반겨 주었던 엄마 뱃속에서, 저 멀리 산에서 제법 센 바람에 기차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칙칙폭폭 움직이던 짙푸른 나무들을 기억하는 걸까. 바람이 점점 강해지면서 가까운 산의 나무들이 한참 먼저 흔들리다가 드디어 눈에서 먼 산의 나무들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나는 굉장히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었다.

하지만 '먼 산의 나무가 움직일 때'는 음산한 분위기의 비극영화였다.

엄마와 열 살짜리 딸아이가 손을 잡고 제법 즐겁게 산길을 오른다. 어딘가 들떠 있다. 둘 다 볼이 발그스름하고 발걸음이 가볍다. 더운 날이라 바람이 시원하다. 끊임없이 새들이 지저귀고 녹음은 산 속 깊숙이 파고들수록 짙어진다. 그 녹색이 너무 짙어졌다고 느껴질 때 별안간 공허하게 커다란 산장이 나타난다. 모녀는 아랑곳 않고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 탁- 하고 문을 닫는다. 귓가에 계속 모녀가 불협화음으로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들리고 화면엔 계속 굳게 닫힌 문이 보인다.

영화는 이제부터 모녀의 산장생활을 보여준다. 느즈막히 일어나 빵 같은 걸로 아침을 때우고 밖에 나가 산책을 하거나 같이 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보낸다. 늦게 자는 편이다. 둘 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각자의 침대로 들어간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 그지없이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이지만, 가만히, 신경을 곧추세우고 보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뚜렷한 정황증거가 아니라 정신적인 불안감이 보는 이의 피부를 슥 훑고 지나간다.

영화가 다 끝나도록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연출했던 두 사람은 사실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서로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항상 어딘가 어긋난 시선- 그 시선에 맞추어 역시 약간 빗기어 나가는 카메라 앵글. 그것은 영화가 끝난 후 그런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관객들의 가슴 속에까지 뭐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가득 채웠다. 아마도 그건 관객들이 자신들의 평온한 집으로 돌아가서야 조금씩 치유될 것이었다.

아이가 그림을 그린다. "엄마! 엄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볼게!" 해맑게 웃으며 엄마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리는 아이. "그래. 얼마나 잘 그리는지 한번 볼까?" 활짝 웃으며 목에 감긴 아이의 팔을 다독이다 풀어내는 엄마. 아이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오느라 부산을 떤다. 아이가 엄마의 발치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자 엄마는 즐겁게 아이와 아이가 그리는 그림을 들여다본다. 아이는 밝고 화사한 원색만을 사용하여 집을 그리고 창문에 예쁜 커튼을 달고 한쪽에는 여러 가지 꽃이 만발한 들판도 그린다. 아이가 빨간색 크레파스를 놓고 잠시 그림을 들여다보다 웃으며 엄마를 말없이 올려다보자 엄마도 아무 말 없이 아이와 얼굴을 마주본다. 아이의 그림이 다 끝났나 생각한 순간, 아이가 다시 엎드려 까만색 크레파스를 들고 그 위에 빠른 속도로 덧칠을 하기 시작한다. 덧칠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아이의 통통한 팔에서 힘줄이 솟는다.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이윽고 화사하던 그림은 새카만 크레파스로 덧칠된 새카만 종이가 된다. 그제 서야 휴우- 하고 땀을 닦으며 아이가 크레파스를 내려놓는다. 여전히 웃고 있다. "다 됐다!" 아이가 즐겁게 손뼉을 치며 엄마에게 그림을 내민다. 엄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같이 그림을 들여다보며 "어머! 집이 참 멋지구나! 분홍색 예쁜 레이스커튼도 달렸네! 와아! 이곳에도 이런 예쁜 꽃들이 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엄마와 아이는 다정하게 서로 마주보며 웃는다. 종이는 그저 새카맣다.

중간 중간 플래시백으로 지금 함께 생활하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모습이 팟- 팟- 나타났다 사라진다. 두 사람은 가족이 아니었던 듯하다. 아니 아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영화는 관객들을 점점 불안의 수렁에 빠뜨리며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낸다. 영화가 끝날 즈음 갑자기 두 개의 플래시백이 화면을 좌우로 나누어 동시에 뜬다. 화면 왼쪽에는 지금 자상한 엄마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여자가 승용차로 자신의 아이를(물론 지금 현재 같이 있는 저 여자아이가 아니다) 유치원에 내려주고 볼일을 보기 위해 시내 도로를 제법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밝은 표정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멍한 표정의 여자가 맨발로 천천히 길을 걷는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여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다. 여자의 몸이 차가 별로 없는 도로 쪽으로 돌아간다. 질주하는 차. 여자는 차가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다. 끼이이이익! 쿵.쿵.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 여자의 몸이 달려오던 차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던 화면이 합해진다. 사고처리로 어지러운 오전의 도로.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받으며 너무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운전한 여자와 수습되어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여자의 시신 옆에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자살한 여자의 열 살짜리 딸.

초콜릿을 좋아했어요. 그날도 입에다 한가득 초콜릿을 넣고 우물거리며 운전을 했죠. 남편이 제주도에 출장 갔다 오면서 사다 준 감귤초콜릿인데 향기가 아주 그럴듯해요. 나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요즘 사는 게 권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직장 그만 둔지 얼마 안돼서 시간이 남아돌아 그랬는지도 몰라요. 저녁엔 뭘 해 먹을까, 집에 꽁치가 있으니까 양파랑 구워서 먹어야지, 찌개는 된장찌개 해야 되겠다, 아 두부도 부- 꽝! 텅. 텅. 그 여자는 제 차에 부딪쳐 멀리 튕겨나가지 못하고 두 번 더 부딪쳤어요. 왜 그랬을까요. 멀리- 내 눈에 안 띄는 곳으로 멀리 나가떨어졌다면 좋았을텐데! 공중에 붕 떠서 앞 유리창에 머리부터 떨어졌어요. 그때 머리가 좀 깨져서 제 운전석 앞 유리에 머리카락과 조그만 덩어리 같은 것들이 달라붙었어요. 여자의 눈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어요. 눈을 부릅뜨고 있었어요. 죽어서도 감지 않더군요. 그런데 내 권태로운 삶은 다 어디 간 거죠? 초콜릿을 먹으면 좋아지는 기분은 다 어디 갔죠? 우리 남편이랑 딸아이 저녁걱정은 누가 하죠? 악몽에 시달리고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건 원래 그 여자 몫이잖아요. 내 감귤 향은 다 어디로 간 거죠?

엄마는 먼 산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했어요. 죽고 싶을 만큼 행복하다고 했어요. 그곳의 나무가 되거나 그곳의 바람이 되겠다고 내게 얘기했어요. 다시 태어나도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요. 그럼 나도 엄마 따라 그러겠다고, 나도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엄마는 나를 꽉 끌어안고 귀에다 조그맣게 '엄마는 혼자 있고 싶어' 라고 얘기했어요. 나는 무지무지 슬펐는데, 여기서 이렇게 먼 산의 나무가 흔들리는 걸 보니까 나무가 되던 바람이 되던 저 곳에서는 같이 있어도 혼자인 거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어요. 엄마는 이제 행복할까요? 우리 엄마는 언제나 혼자였어요. 모두들 그 여자한테 가서 괜찮냐고 묻고 따듯한 커피도 주고 그러던데. 그 여자는 벌벌 떨고 있던데 그래서 그런가요? 우리 엄마는 몸을 막 떨지도 않고 이제 아무 말도 못하고 저러고 있으니까, 아무렇게나 덮어두고. 우리 엄마는 죽어서도 혼자였어요. 엄마는 그래서, 이제 행복할까요?

삽화=화가 고예현

검은 무지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뚫린 창을 넘어 걸어 나갔다.

후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나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영화가 이런 내용인 줄 알았다면 절대 빌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괜히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갑자기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떠 잠들 때까지, 아니 꿈속에서조차 서로를 절대 잊지 않으며 할 수 있는 한 철저히 미워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고 싶지가 않았다. 분명 영화는 픽션이지만 지구의 60억 수많은 인구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나는 가슴이 누가 불을 지른 것처럼 뜨거워졌다. 나조차도 이미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그놈을 찢어 죽였으니까.

슬그머니 일어나 부엌에 가서 괜히 서성거렸다. 싱크대로 만져보고 손잡이도 잡아보고 수도꼭지도 돌려 보았다. 식탁위의 약봉지도 들춰보고(여전히 한 봉지의 약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행주로 식탁도 훔치고 프라이팬을 꺼내다가 다시 돌려놓았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달걀도 식빵도 김치도 없었다. 쌀통을 열어보니 쌀도 없었다. 아이가 돌아오면 엄마가 해 주는 따뜻한 음식을 해 먹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

'먼 산의 나무가 움직일 때'가 보여준 미움의 방식은 단순했다. 그들은 함께 살면서 단 한 번도 뜨거운 음식을 함께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무섭도록 말라갔다. 마지막 장면에서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바싹 말라 시커먼 얼굴로 웃고 있었다. 삶의 에너지를 모두 상대를 미워하기 위해 써 버린 두 사람의 얼굴은 더 이상 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독히 미워한다는 게 포동포동하고 따뜻한 인간의 살을 얼마나 소진시키는 일인지 저 두 사람의 물기 없는 버석버석한 피부 밑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자기 자신마저도.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병.

TV는 계속 눈이 빙글 돌아가는 숫자로 이루어진 사망자수를 갱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었을까. 저 숫자들처럼. 모두들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홀연히 익명의 숫자 뒤편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시시각각 점점 가속이 붙는 내 자신의 속도를 모르는 체 할 수 없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느다란 속도가 가속이 붙어 계속되는 밤 속으로 한없이 뛰어들고 있음을 모르는 체 할 수 없었다.

나는 혹시 지금까지 영화 '나 여기 있다'를 손수 찍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 여기 있다'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가장 무서운 영화였다.

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외모의 사무직 여성의 생활이 별다른 편집 없이 죽 이어진다. 김지수가 주연했던 한국영화 '여자, 정혜'와 거의 비슷한 패턴이다. 하지만 여자 정혜처럼 왠지 어둡거나 지쳐보이진 않는다. 큰 상처를 받았던 과거도 없다. 누가 봐도 평범한 20대 중후반의 직장여성이다. 그렇게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 생활들이 무겁지 않고 때로는 명랑하게 흘러간다. 같은 직장에 다른 여직원들에게도 인기최고인 김대리를 남몰래 좋아하고 가끔 붉은 장미나 달리아를 사들고 집에 간다. 붉은색 계통을 좋아하는 것 같다. 침대보와 이불도 차분한 붉은색이다. 아침은 맨날 늦게 일어나 허둥지둥 나가기 때문에 거르기 일쑤다. 지하철 화장실 안에서 화장을 한다. 그래도 지하철 칸에서 대놓고 화장을 하는 건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하나 보다. 업무 중에는 틈틈이 카톡을 한다. 가끔 날이 따뜻하면 꾸벅꾸벅 존다. 퇴근 후에는 대개 떡볶이나 초밥 같은 먹을거리를 사 들고 집에 간다. 가자마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사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TV를 보고 깔깔대고 자주는 아니지만 비디오를 빌려다 영화를 본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줄줄 울기도 하고 '배틀로얄'을 보고 난 밤에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주말에는 트레이닝복에 조깅화를 신고 15분 거리의 공원에 가기도 한다. 그리고 막상 공원에 와서는 좀 더 옷차림에 신경 쓰고 나올 걸 후회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말의 공원에는 무척 사람이 많다. 술은 잘 못 하지만 가끔 캔맥주를 사다 혼자 마신다. 방 벽에는 장국영의 사진이 붙어 있다. 음식물 쓰레기에는 조각난 당근과 감자와 양파와 피자테두리빵과 곰팡이 슨 밥과 멸치볶음과 쉰 김치가 있다. 얼마 전에는 큰맘 먹고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다가 3년 내내 죽고 못살던 첫사랑 남자애가 제일 싫어했던 재수 없는 기집애랑 결혼걸 보고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생활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는 별탈 없는 자신의 하루하루에 별 불만이 없었다. 둔한 그녀도 알아챌 만큼 집요한 시선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건 좀 이상한 집요함이었다. 그냥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는 정도의 약간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상적인 불쾌감이 아니라, 여자가 어디서 무얼 하든 그 행동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불길함이 그 집요함의 중심부에 자신만만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메라도 여자의 모습이 안정적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인 것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위치가 부자연스러웠다.

명백히 느껴지는 그 자신감에 압도되어 여자는 자신이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비가 오는 늦은 밤 야근을 하고 퇴근을 하거나 할 때는 너무 무서워서 언제라도 112번을 누를 양으로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다고 해서 여자의 깊은 구석까지 까발리는 시선의 집요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자는 실제로 꿈에서 자신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갈려 피부와 살과 내장을 그대로 달고 양말 뒤집어지듯 완전히 뒤집히는 꿈을 꾸곤 했다. 여자가 동요할수록 시선은 더욱 차가워지고 진득해졌다. 그 감촉이 실제로 피부에 느껴져서 여자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하루에 세 번 이상 샤워를 했다. 하지만 그 진득한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가 노이로제로 인해 직장에서 언뜻 언뜻 환각인지 실체인지 숨어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까지 목격하고 돌아온 밤에는 열이 40도까지 끓었다. 여자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까지 여자의 일상은 평온하기만 했다. 무엇이 자기의 소중한 일상을 망쳐놓았는지 여자는 알 수가 없었다. 분노가 일기 보다는 왠지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서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있었다.

겨우 집에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고 여자는 도망치듯 침대로 뛰어 들었다. 녹초가 되어 너덜너덜한 몸을 덮어주는 양모이불이 오늘따라 유난히 안락하게 느껴졌다. 왠지 아득하게 먼 곳에서 내 것이 아닌 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래. 네 것이 아니야. 넌 그냥 몸뚱이 없는 혼일뿐이라고. 이제 몸으로 돌아와."

차갑고 진득한 목소리! 여자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침대 머리맡에 자기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의 몸이, 그러니까 영혼이, 순식간에 육체의 벌린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무한 침묵이 남았다. 엉거주춤 젖혀진 포근한 양모이불이 누군가 있었던 흔적으로 텅 빈 동굴처럼 시커멓게 솟아올라 있었고, 그 옆에 사라진 여자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잠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는 모습이 고딕회화처럼 화면에 박혀 있었다. 여자의 입가가 서서히 양쪽으로 올라가며 미소를 보여주었다. 보고 싶지 않은 웃음이었다. 여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목을 돌리고 팔을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는 벌어져 있던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평생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흉악한 악몽에서 허우적대다 막 깨어난 것처럼 영화를 다 보고 식은땀을 흘리며 두리번거린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가끔 뜨거워진 손으로 몸을 더듬어보며 내가 잘 있는지 확인해 보고, 내가 내가 아닌 건 아닌지 내 혼이 혹은 내 육체가 어디서 몸을 웅크리고 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곤 했다.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병을 걱정하곤 했다.

밤은 계속 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10분 후에 불현듯 낮이 된다 해도 더 이상 낮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알지 못하고, 쉭- 한껏 가속이 붙은 속도로 알파와 오메가를 알 수 없는 이 긴 밤의 어둠속으로 지금도 뛰어들고 있지 않은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생의 속도. 약을 타러 간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TV는 계속 사망자의 카운터를 올린다.

남편은 살해되었다. 일명 '묻지마 살인'이었다.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계속되는 밤의 어둠 같은 살인.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듯 졸린 눈을 하고 갔다 올게- 하고 나갔던 남편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예감을 했는지 불길한 생각에 자꾸 속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아이를 재우고 밤새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스크림을 퍼 먹었는데 남편은 계속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형사가 찾아와 남편이 칼로 12번 찔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 아마도 그때인가 보다. 돌연 끝없는 밤이 시작된 것이.

밤이 계속되는 동안은 내게도 있었던 행복했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악몽이 되었다. 나는 행복했던 기억을 재료로 매일 가위에 눌렸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다급히 엄마에게 약을 먹이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동안 아이의 외로움은 내가 먹어 버렸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이 밤이 지나면 분명 낮이 된다는 것을 체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검은색이 내 어둔 밤을 채워 갔을까. 이렇게 되기까지 아이는 얼마나 많은 용기로 하루하루 날짜를 세고 있었을까. 달력을 보니 지나간 날짜라고 예상되는 숫자들에 차례차례 빨간색 매직으로 커다랗게 X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아이를 찾으러 나가야겠다.

부엌을 샅샅이 뒤져 먹을 것을 찾아냈다. 어느 낮의 군고구마인지 뜨거운 불에 덴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을 조심스럽게 베어 먹고 물을 마셨다. 오랜만에 거울을 보니 행복했던 시절의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쑥 들어간 눈 밑에 검은자위에다 화장품을 바르고 문질렀다. 입술에다 분홍색 립스틱도 발랐다. 오래전에 썼던 건지 끝이 짧고 뾰족해져 있었다. 희미해진 유통기한을 보려고 애쓰다 그만두었다. 옷장 속 바구니에 넣어 두었던 분홍색 투피스도 잠시 들여다보고 다시 넣어 두었다.

준비를 마치고 창밖을 보니 여전히 캄캄한 게 아직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인적도 없었고 풀냄새도 나지 않았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다 아, 집에 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문을 만들어 달라고 업체에 전화를 하려다 전화도 없다는 걸 떠올렸다. 이래서야 참 번거롭겠네.

TV의 플러그를 뽑아 버렸다. 계속 된 밤 동안 폐허가 된 풍경을 비장하게 전시하던 브라운관이 단숨에 숨을 죽였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플러그 뽑힌 TV의 육중한 몸체를 들어 올렸다. 거의 먹지 못한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버거웠지만 그럴수록 커다란 몸체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눈으로 거리를 가늠해보니 거실탁자쯤이 적당해 보였다.

하나- 두울- 셋!

웅크리고 있으면서 축적한 힘을 다 끌어 모아 13개의 창을 향해 TV를 던졌다. 육중한 구식TV가 아주 느린 속도로 반원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이를 기다리며 지센 끝없는 밤으로 만들어진 검은 무지개가 공중에 커다랗게 포물선을 새겼다. 나는 오랫동안 그걸 바라보았다. 마른 두 다리가 꿈틀대며 용기를 얻을 때까지 검은 무지개의 오래 묵은 불길함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내게 흐르고 있던 시간감은 변명할 수 없이 느렸다. TV는 빨리 날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TV는 엄청나게 커다란 소리를 내며 13개의 창문을 모조리 깨부수었다. 검은 무지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뚫린 창을 넘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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