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실험의 시험-이은담

[2015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실험의 시험-이은담
  • 입력 : 2015. 01.05(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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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운이 내게 괜찮냐고 물었을땐
네, 밥을 먹고 왔지요 하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이제 붕대를 감겠습니다
반대쪽 손목에 원하는 만큼 발라주었다. 
가로 세로 백이십 밀리미터… 
그 정도면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미란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간단한 실험이었다. 간단하다고 생각했고, 간단하지 않다면 간단하게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밥 먹을래 하면 밥을 같이 먹는 것처럼 일상생활과 다르지 않았고 충분히 내 의사에 대해 생각하고 ㅡ 물론 그 시간이 매우 짧았지만 ㅡ 결정을 내렸기에 흰 가운이 내게 괜찮냐고 물었을 땐 네. 밥은 먹고 왔지요. 하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내는 내 검지를 슬며시 잡으며 진중한 눈길로 바라봤다.

이제 붕대를 감겠습니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지 이미 내 검지는 단단한 부목에 기댄 다음이었다. 거기다 붕대는 이미 한 바퀴, 두 바퀴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결정이라는 걸 하면서 사는데 대부분 습관적인 경우가 많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미리 축적시켜놓은 정보에 따라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갈 때가 있는데 흰 가운을 만나게 됐을 때는 나의 반사 신경이 가장 활발할 때였다. 집에서 놀고먹는 백수에게 잘 아는 선배가 전화를 해 안부를 묻다가 대화사이에 틈을 노려 "너 알바 할래? "했을 때 집에서 놀고먹는 백수에게 선택권은 거의 없다. 아니 누구에게 뺏길까봐 서둘러 달려들듯 대답했다. 선배는 약품회사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실험을 도와주면 된다고 했다.

약품회사요? 약 먹고 그런 거예요?

약 먹었냐? 너 그렇게 생활이 궁해?

선배의 말은 권위적이고 어감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괜히 심기를 건든 것은 아닌지 움츠려들었다. 집에만 박혀있다 보니 간이 쪼그라드는 건지. 선배가 하는 말은 간단했다. 선배의 선배가 이번에 혁신적인 연고를 만들었는데 그것에 대한 임상실험이다. 먹는 것도 아니고 바르는 거라니 권위적인 선배의 어투에 애정이 녹아있는 것처럼 들렸다.



우선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재하여야 했다. 인적사항을 훑어보며 흰 가운은 형식적인 질문을 했는데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질문들은 낯설지 않았는데 헌혈을 할 때와도 비슷했다. 과거병력이라거나, 현재 앓고 있는 병은 없는지, 습관적으로 먹는 약은 있는지를 넘어 불특정 다수와 성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후천성 면역 결핍증의 징후가 있는지 같은 매우 노골적이면서도 불쾌한 질문들이었다. 질문이 끝나기 전에 아니오를 대답하면서 만약 저 질문 중에 하나의 질문이라도 네라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잔인한 질문인지 알고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각별히 조심하셔서 보안유지 해주셔야 합니다. 만약 어길 시엔 법적처벌과 동시에 책임을 묻겠습니다.

내가 아니오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아니오에 체크하고 있던 흰 가운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을 땐 찬물바가지라도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습관적으로 아니오할 뻔 했던 입은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 실험은 회사의 사활이 달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연고의 성분이라든지 효과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 그것은 유출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리고 효과를 말해줄 수 없는 것은 플라시보 효과와도 관련 있는데 사람이란 모름지기 최면의 효과가 강해서 만약 연고의 효과를 내가 알아버리면 그대로 내가 거기에 초점을 맞출 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다만 안심해도 될 건 이 실험은 오랫동안 준비되어 왔던 것이고, 이미 동물실험을 통과한 상태며 처음 하는 임상실험은 아니라는 점, 눈에 띄는 부작용이라든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왜 임상실험을 또 하는 거죠?

임상실험의 결과가 많을수록 실험의 결과는 신뢰성을 확보하니까요.

당연한 말을 묻고 있다는 듯 흰 가운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을 때 꼭 그가 내게 조용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귀가 먹먹해졌다.

그럼 실험을 진행해보도록 하죠.

흰 가운이 말했을 땐 이미 내 입에선 네라는 말이 나간 후였다. 흰 가운은 만족했는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사무실 한 구석에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흰쥐가 멈출지 몰라 발을 구르고 있는 것처럼 상황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는 우선 장갑을 꼈다. 장갑은 마치 뱀의 가죽처럼 반들거리고 날렵해 보였다. 그는 그의 책상에 있는 소형 냉장고에서 두 개로 포개어진 페트리 접시를 꺼냈다. 위에 있는 페트리 접시를 열자 반투명한 젤 타입의 연고가 들어 있었다. 그는 내게 소매를 걷으라 말했고 소매를 걷자 납작한 금속막대로 안쪽 손목에 빵에 버터를 바르듯 연고를 발랐다. 연고는 정확히 정사각형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딱 그만큼에 반창고로 조심히 연고가 세어 나오지 않게 붙이고 붕대로 감아주었다.

주의할 점은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선 달력을 보고 삼일 뒤에 나와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혹시나 이상한 점이나 효능이 느껴진다면 그 전에 자신에게 연락을 주어도 좋다고 했다. 나쁠 건 없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실험은 시작되었다.



순전히 건강이 아닌 담배 값 때문에 담배를 끊기 위해 금연클리닉에서 붙였던 금연패치와 별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그 차갑게 응고된 연고를 발랐을 때 손목 안쪽에 퍼지던 묘한 느낌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진 않다. 뭐랄까. 한 여름 물탱크 청소로 단수가 돼서 몸을 못 씻은 지 너무나 오래됐는데 ㅡ 거기다 가정해서 마침 난 결벽증 환자였고 ㅡ 처음 나오는 청량한 물에 몸을 내던진 느낌이랄까. 그건 좀 그러니까, 그 연고를 바르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로 씻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몹시도 차가워 소름을 유발했지만 그 느낌이 결코 불쾌하지는 않았다. 너무도 차가워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흰 가운에게 하려다 아무리 봐도 이성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물론 이 실험의 대가로 돈을 받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보의 경계는 내가 그을 수 있는 거니까. 주머니가 가볍다고 입이 가볍고 싶지는 않았다.

딱 세 번 오늘 뭐 하지? 하니 삼일은 지나갔다. 사실 다 그저 그런 비슷한 날들이니 구분 짓는 게 더 이상한지도 몰랐다. 삼일 동안 나갈 일도 없었고 이력서만 죽어라 쓴 내게 붕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흰 가운을 보기로 한 날 씻기 위해 붕대 위에 랩을 감았던 것을 제외하고 딱히 붕대가 거슬린 적은 없었다.

흰 가운은 만족했다. 별 다른 느낌을 말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도. 우선 연고에 거부반응이 없으니 실험은 성공적이라며 독려했다. 흰 가운은 어울리지 않게 꽤 오랫동안 나를 추켜세웠는데 그만 우쭐해지고 말았다. 나약한 사람이란 으레 그렇듯이.

하지만 우리 사이에 분위기가 깨진 건 찰나였다.

이게 뭐죠?

흰 가운은 그런 내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처럼 행동했다. 흰 봉투에 들어있는 돈은 칠천 오백원이었다. 그저 연고만 바르고 있다가 받은 돈 치고 많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삼일이란 시간도 지났고 난 그 시험의 위험성ㅡ 이 물론 없다고는 하지만 ㅡ도 모르고 참여했다. 딱히 실험에 참여한 적은 없음에도 흰 가운의 독려가 독이 되어 나를 거만하게 했다. 임상실험 아르바이트 보수 치고 삼일 보수에 칠천오백원이면 퍽 작아보였던 것이다. 선배가 소개해주는 아르바이트니 보수에 대해 묻지 않고 그러려니 했던 게 실수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있었다. 분명 내겐 중대한.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폐의 감촉이 시렸다. 채워지지 않았다. 흰 가운은 그때 내 손에 있는 봉투를 보았다.

그건 회사 내규에 정해진 돈입니다. 전 그것보다 적게 드릴 수도, 많이 드릴 수도 없습니다.

흰 가운은 내 손에서 떼어낸 붕대를 뭉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물론 더 많이 드릴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실험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듣도 보도 못한 지급방식이었다. 연고를 바르는 부피도 아닌 넓이만큼만 금액이 지급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흰 가운은 혹시 넓이 구하는 공식을 알고 있냐고 내게 물었다. 그는 첫째 날 정확히 내 손목 안쪽에 가로, 세로 오십 밀리미터의 정사각형만큼만 발랐으므로 이천오백원에 삼일을 곱해 칠천오백원이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칠천오백원이라니. 그것은 너무 적었다.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차비만 해도 왕복 이천백원인데 고작 삼일동안 번 돈은 오천사백원이었다. 오천사백원을 칠십이시간으로 나누면 난 고작 반올림해서 한 시간에 칠십오원 밖에 벌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적다. 입을 떼려고 할 때 흰 가운은 예상했다는 듯이 내게 수긍해주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주 사용하는 부위에 바르면 배로 쳐준다던가, 당연히 바르는 면적이 넓어지면 그만큼의 보수가 나온다는 것, 만약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라도 그만두어도 된다는 것, 혹시라도 부작용이 생겨도 사후관리가 철저하니 걱정할 것 없다는 것, 선택은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으니 알아서 선택하라는 것들이었다. 그건 그 나름대로 위안이 되었다. 선택권이 주어진 것만으로 기분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실험은 계속 진행되기로 한다. 그는 내게 손가락을 권했지만 명색이 취업준비생인 내게 이력서를 써야 하는 손가락은 부담이 되었다. 반대쪽 손목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만큼만 발라주었다. 순순히 내 결정이었다. 가로 세로 백이십 밀리미터, 그리고 날짜는 나흘 뒤. 그 정도면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미란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삽화=변금윤



연락 올 줄 몰랐어. 취직할 때까지 연락 안 한다더니.

미란은 새치름하게 말했다. 얘가 이렇게 예뻤었나. 미란이 아이스 모카치노를 스트로로 쪼옥 빨 때마다 온 몸에 피가 거꾸로 흘렀다. 미란은 같은 대학교를 나온 후배였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 미란과 나는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 역시도. 하지만 미란에겐 아니었다. 미란은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졸업을 해서 취직을 했고 아직도 난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맛있는 거 사준다며.

흰가운에게 받은 돈은 오만칠천육백원. 거기다가 나흘 전에 보수로 받았던 칠천오백원. 미란이가 먹은 아이스 모카치노는 오천삼백원. 내가 먹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삼천팔백원. 덧없이 구천백원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돈은 오만육천원이었다. 밥 한 끼 먹는데 적은 돈은 아니었으나 데이트금액으로는 썩 여유로운 금액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집에 라면도 떨어지고 없다. 실험실에는 나흘 뒤에 가기로 했으니까. 하루에 두 끼 라면을 먹는다면 오늘을 제외하고 라면 일곱 봉이 필요했다. 그럼 칠백오십원 곱하기 칠. 오천이백오십원. 그 돈을 제외하고 나면 오만칠백오십원. 잘하면 미란과 DVD방에 갈 수도 있으니까 만이천원을 빼고 계산하면 삼만팔천칠백오십원이 남는다. 이정도면 충분히 한 끼 식사는 때울 수 있다.

뭐 먹고 싶은데?

음, 오늘은 빕스가 당기는데?

계산오류다. 빕스라니. 샐러드 바만 이용한다고 해도 평일 디너 요금 이만칠천구백원. 둘이라면 오만오천팔백원. 부가세 십퍼센트를 더하면 육만천삼백팔십원. 이미 살 수 있는 허용치는 벗어났다.

그러지 말고 우리 오랜만에 삼겹살이나 구워먹자.

삼겹살? 지금 농담하는 거지?

미란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비난에 가까웠다. 저 눈썹을 반듯이 안 펴준다면 영원히 DVD방은커녕 안녕이다.

어. 그럼 농담이지. 여전히 예능을 다큐로 받네.

미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여전하네. 우리 그럼 일어날까? 근처에 빕스 있어.

나 얼마 전에 빕스 다녀왔어. 거기 먹을 것도 없더라.

설마 진짜 삼겹살 먹으러 가자는 거야?

또 다시 빨간불이다.

미란과 내가 향한 곳은 대학시절 자주 가는 스파게티 전문점이었다. 미란의 표정이 삼겹살보다는 훨씬 풀어졌다. 대학시절 때 너와 참 좋았었다며 그때를 다시 회상하는 의미로 가자했을 때 미란은 얼굴을 붉히며 끄덕였다. 밥 한 번 먹기 어려웠다.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빕스에 비하면 양호할 것이다. 거기다 이런 분위기에 말까지 잘하면 미란의 살내음도 먼 것이 아니다. 아래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다. 메뉴판을 펼쳤을 때 피는 다시 위로 역류했다. 안 온 사이에 메뉴판까지 바뀌고 가격도 올라있었다.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난 크래미 빼스카토레. 오빠는?

크래미 빼스카토레 만오천원.

어. 난 토마토 스파게티.

토마토 스파게티 만원. 합계 이만 오천원. 그렇다면 잔액 만삼천칠백오십원.

그걸로 식사가 되겠어? 피자 먹을까?

피자는 다음 기회에 먹지 뭐. 어제 술을 마셨더니 더부룩해서.

침이 꼴깍 넘어간다. 흘끔 미란을 보니 별로 개의치 않은 듯 했다. 다행이었다.

그래. 그럼. 여기 크래미 빼스카토레랑 토마토 스파게티, 그리고 팔마햄과 겨자소스를 곁들인 시금치 샐러드 주세요.

팔마햄과 블라블라 샐러드는 팔천오백원. 잔액 오천이백오십원. 미란의 공격은 끝난 듯 했다. 이정도면 무난했다. 그런 미란의 손이 아직 메뉴판을 놓지 않았다. 더욱 문제인 것은 다시 메뉴판에 시선을 두었다는 것.

와인도 한잔할까? 뭐 마시고 싶어?

미란이 메뉴판 마지막장에 있는 주류페이지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비교도 되지 않는 타격이다. 이건 탈탈 털어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피자도 거부했는데 술까지 거부할 수는 없다.

하우스 와인 두잔 주세요!

미란이 메뉴판을 넘기던 손짓을 멈칫한다. 그리고 아마 나에 대한 마음도 멈칫한 것 같다. 만회할 기회는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하우스 와인 육천 곱하기 이. 만이천원. 이미 예산초과다. 육천칠백오십원이 부족하다. 라면과 미란과의 DVD방 사이에서 갈등한다. 라면을 사는 돈을 쓴다면 칠백오십원이 남는다. 나흘 정도는 물과 쉰 김치, 라면 한 봉으로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책 없이 성욕을 택한다. 그동안 매일매일 풍족하지는 않아도 식욕은 채웠으니 성욕 한 번쯤 노려볼만한 시기도 됐다. 오늘만큼은 내 생물학적 성에 충실히 따르고 싶었다.

그 후 식사시간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미란이 간간히 웃기도 했고 오랜만에 들어간 기름기 많은 음식은 날 여유롭게도 했다. 미란과 같은 추억을 공유했다는 것이 뿌듯했다. 물론 종이를 씹는 것 같은 팔마햄과 시금치나물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시금치조각이 조금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것들이 내 삼일 식비를 웃돈다는 것에 조금 울컥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도 같은 밤이었다.

하지만 오만사천육백원의 행복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미란이 정확하고 날카로운 손을 날려 내 뺨에 맞춘 것은 바로 레스토랑 앞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픈 것은 뺨이 아니었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낀다. 눈앞엔 미란의 번쩍거리는 구두가 삐뚜름하게 서있었고 차마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창녀야?

미란에게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그리고 조심히 DVD방에 가자고 권했다. 웃고 있던 미란의 얼굴이 깨진 것은 찰나였다. 미란과 나는 대학시절에도 수시로 잠을 잤다. 주로 서로의 자취방에서였고 가끔 아르바이트 비가 생기거나 용돈이 넉넉할 땐 DVD방에 가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의례인 듯 서로의 몸을 샅샅이 품었다. 우리는 그 조그만 정사각형 공간 안에서 영화보다 더 서로의 몸을 새기며 킥킥거리곤 했다. 난 그 어떤 영화의 내용보다 미란의 몸을 더 세세하고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미란은 하지만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고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뒤돌아 걷기 시작한다. 그때서야 미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미란은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고 내 말은 미란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미란이 떠남으로써 내게는 만이천칠백오십원이 생겼다. 자장면도 먹을 수 있고 백반도 사먹을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을 치료하기에 만이천칠백오십원은 작았다.

한 손가락만 감으려는 내게 흰 가운이 말했다.
지급금액 팔십사만사천이백원. 특별수당 삼십만원.
백십사만사천이백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결과 난 지독히도 고독해졌다. 시간이 가질 않았다.

오랜만에 본 흰 가운은 내 차트를 펼쳤고 
용의주도한 미소를 보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실험을 계속하시겠습니까. 


흰가운은 내 등에서 하얀 거즈를 제거했다. 가로 세로 백오십밀리미터 기간은 삼일. 육만칠천오백원.

특이하시네요. 등에 붙이시고.

흰 가운은 핀셋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등에 붙였던 건 미란과의 혹시 모를 관계에 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흰가운이 모를 것이 분명한데 얼굴에 불콰하게 열이 올랐다.

이번엔 어디에 붙여드릴까요?

보통 사람들은 어디에 붙이나요?

흔히 초기엔 내 눈엔 보이지만 다른 사람 눈엔 안 보이는 곳.

그렇게 말한 흰가운은 옅게 웃어보였다.

사람들은 시각에 많이 의존하잖아요. 그래서 자기 눈에 보이는 곳에 붙이고 싶어 하죠.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이는 곳에 붙이고 싶어 해요. 그래서 추천 부위는?

흰가운은 바지를 벗으라 했다. 그 말에 허둥지둥 바지를 벗느라 주머니 안에 동전들이 짤랑거리며 떨어졌다. 당황한 내가 동전을 주우려 할 때마다 동전들은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멀어졌다. 흰가운은 자로 잰 듯 정확한 양만큼만 발랐다. 가로, 세로 백팔십밀리미터. 사각형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동안 팔과 손목, 등에 발랐지만 부위를 다르게 하니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걸을 때마다 바지 안쪽에 스치는 붕대에 이물감이 들었다. 허벅지라니. 건물 앞에 서서 끊었던 담배를 물었다. 그것은 미란이 내게 선물해준 여유금액에 일부였다. 한 개비를 들어 불을 붙이고 막 빨아드리려는 찰나 낯선 사내가 말을 걸었다.

저도 불 좀.

남자에게 불을 붙여준다.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에 대한 대가인 듯 나는 그를 천천히 훑어본다. 남자는 나와 동갑 아니면 한 두 살 위로 보였다. 다부진 어깨와 그슬린 피부 톤은 그가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왔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는 꽤 여유로운 표정을 갖고 있었으며 오른쪽 팔과 손가락들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남자가 굳이 숨기려 한 것은 아니어서 마음껏 봐주었다. 만약 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면 남자가 어딜 다쳤다고 생각했겠지만 장소로 보나 행색으로 보나 그는 여지없이 실험참가자였다. 그때 그는 담배를 껐고 내게 가볍게 웃은 뒤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문득 왼손으로 어색하게 담배를 피던 남자의 실험참가비가 궁금해졌다.



날씨는 더워지고 인상은 써지고 이력서는 구겨졌다. 덤으로 자취방 아줌마에 마음은 졸여졌다. 아무리 문장을 꾸며도 이력서 안의 문장들은 나는 조급하고 다급하며 매우 급하다. 나는 간절하며 누구보다 애절하며 고만고만한 애들 중에 그만 좀 간 보고 어서 날 뽑지 않으면 난 이 더운 방 안에 절여지고 말 것이다에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이력서에는 되도 않는 거만을 넘어 욕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러다간 엉엉 울면서 이력서에 살려주세요라고 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심했다. 손가락에 감기로. 이력서 따위 될 대로 되라하면서. 나는 라면, 자취방, 변태남이 아닌 웰빙, 원룸, 매력남이란 단어에 어울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미란의 연락이 왔다. 미란은 조심조심 머뭇거리며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해주었다. 울고 싶었다. 그런 미란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미란을 좋아했었나. 미란은 그 어느 때보다 내게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날 거부한 순간 그녀는 내게 동정녀이자 성녀가 되어있었다. 목이 말랐다. 개수대에 물을 틀었다. 손가락을 물줄기에 갖다 대려다가 아차 싶었다. 연고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그동안은 샤워할 때만 조심하면 됐는데 손가락으로 올라온 붕대는 걸핏하면 신경을 거슬렀다. 거기다가 단단한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기 때문에 자판도 맘대로 누를 수 없었다. 옷을 입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문을 열 때도 붕대는 시도 때도 없이 존재를 부각했다. 마치 촉수처럼도 보였다. 난 거대한 하등 무척추동물이 된 것 같았다. 그저 촉수만 꿈질꿈질 거리는 삶. 열 손가락에 다 감은 것은 옳은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흰 가운은 신중히 내게 물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한 손가락만 생각했다. 하지만 흰 가운이 지급금액을 말하는 순간 마음은 요동쳤고 잠재워지지 않았다. 손가락은 자주 쓰는 부위이기 때문에 지급금액이 두 배이고 엄지와 검지일 경우 네 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열 손가락을 다 감을 경우 특별금액을 추가해준다는 것이다. 특별금액을 묻자 흰가운은 삼십만원 정도면 어떠냐고 물었다. 의연한 척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입안의 혀는 꺼끌꺼끌했다. 벌써 그동안 실험에 참가하며 받았던 시험비용에 웃도는 금액이었다. 등이 축축했다. 흰가운은 우리 사이에 찰나의 순간도 용납지 않은 것처럼 우선 손가락의 사이즈를 측정하자고 말했다. 얼떨떨하게 그에게 열 손가락을 내어주는 순간 이미 내 선택권은 박탈당했다. 실험실 안에 흰쥐가 통통 거리며 쳇바퀴를 굴렀다. 흰 가운은 손가락의 밑 둘레와 길이만 쟀다. 긴 줄자가 손가락을 감을 때마다 뱀이 똬리를 트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의 경우 기존에 감았던 부위보다 예민한 부위이기 때문에 일주일이 시한이었다. 일주일 동안 열손가락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한 손가락만 감으려는 내게 흰가운이 지급금액을 말했다. 지급금액 팔십사만사천이백원. 특별수당 삼십만원. 백십사만사천이백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결과 난 지독히도 고독해졌다. 시간이 가질 않았다. 언젠가 봤던 영화 가위손에 에드워드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아마도 지금 지구상에 가장 외로운 사람은 나일 것 같았다.

씻으려고 할 때마다 전쟁이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빳빳한 손에다가 비닐장갑을 끼는 것은 곤욕이었고 겨우 손등부분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힘이라도 주려하면 비닐장갑은 쉽게 찢어졌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손가락 안엔 땀이 찼고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그러다보면 이미 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그렇게 실패를 반복하다가 고무장갑을 생각해냈다. 고무장갑을 두 발로 고정시킨 후 손가락을 넣었다. 고무의 탄력 때문인지 비닐장갑보다는 수월했다. 이제 씻기만 하면 됐다. 시큼한 땀 냄새가 훅하고 끼쳤다. 물을 틀고 몸에 끼얹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물론 손으로 씻는 게 아니라 고무로 문지르고 있어 원하는 만큼에 만족감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손가락에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마도 몸에 물을 적시면서 방심한 사이에 물이 흘러들어간 모양이었다. 곰팡이가 핀 바닥에 알몸으로 쓰러졌다. 통증은 깊숙했고 날카로웠다.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아니 혼절했다. 정신을 차리니 샤워기가 위로 솟구쳐 물방울이 다리에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렀고 씻다만 몸에 냄새는 하루가 갈수록 농도가 짙어지다 흐릿해졌다. 씻는 게 두려웠고 페트병만 봐도 무서워졌다. 내가 나의 상태를 감지하지 못하는 만큼 무기력해졌고 시간은 매우 견고하고 촘촘히 지나갔다. 일초와 일초의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있을 만큼.

삽화=변금윤



흰가운은 내 열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은 핏기를 잃고 퉁퉁 부어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가락이라기 보단 시체의 손가락으로 보였다. 더듬거리며 사고를 말하는 동안 죄인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견디고 견뎠는데 혹시나 사고로 지급액이 날아간다면. 그래서 사고를 당했을 때 몸을 벌벌 떨면서도 흰가운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버티고 버텼을 뿐이다. 그가 거절의 말을 할까봐, 내게서 붕대를 풀어버릴 까봐, 내게 돈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온전히 공포의 시간을 참았다. 내 얘기를 듣는 동안 흰 가운은 턱을 긁었고 손을 그러모았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내 시간들이 우습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네요. 통증이 심하셨을 텐데.

흰가운의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음 말을 이었다.

물은 약효를 가속화시킵니다.

예?

그만큼 고통이 수반되고요. 그래서 권장하는 방법은 아닙니다만,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뭐 그 고통이 실험자에겐 문제가 될 수 있지만요.

흰가운 딴에는 농담을 던진 것이겠지만 전혀 웃을 수 없었다. 내 얼굴을 보더니 흰가운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앞으로 물에 닿으면 바로 연락해주세요. 물이 닿는 순간 약효가 스며들어서 붕대를 감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럼 실험참가비용을 드려야겠군요.

흰가운은 내 실험비용을 챙기기 위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공간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 번 이곳을 방문하고 돈을 받기 전에 언제나 흰가운은 나갔다 들어왔지만 낯선 적요였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통통 소리를 내는 흰쥐는 없고 빈 사육 상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공간 안엔 그 흔한 시계초침소리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 꼼꼼히 샤워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흰 가운은 실험을 계속 하겠느냐 물었지만 쉬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내 온 몸을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동안 실험에 참여하는 동안 부분적으로 씻었을 뿐 온전히 몸을 씻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미란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 전에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들려 사십만원을 냈다. 제날짜보다 먼저 낸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친절이 베여있었다.

미란은 머뭇거렸지만 결코 미안한 기색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자신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에 대해 신경 쓰는 눈치였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별 의미 없이 커피를 마셨다. 미란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커피 값을 계산하기 위해 펼친 지갑의 두께에서 미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 단순하다는 것이 슬펐다.

오빠. 우리 백화점 안 갈래? 나 살 거 있는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수를 두는 미란이 딱해졌다. 그 이후는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미란은 비참해보였다. 미란은 한 점포 안을 서성이며 곁눈질로 계속 한 가방을 주시했다. 딱 보기에도 이미 오래 전 미란이 찍어둔 것임이 분명했다. 차라리 사 달라 말했다면 이런 참담한 기분이 되지 않았을 텐데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미란은 어서 빨리 내가 눈치 채길 바라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노골적으로 가방을 쳐다봤다.

저 가방 사줄까?

덧없이 사십팔만원이 날아갔다. 아직 주머니엔 여유가 있었다. 돈을 쓴 것에 대해 딱히 후회감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붕대를 감으면 될 일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손가락엔 감지 말아야지. 샐러드는 아삭했고 드레싱은 짰다. 미란은 연신 웃으며 내 접시에 자기가 덜어온 음식을 신나게 옮겼다. 스테이크는 뻣뻣하고 육즙은 증발했다. 수많은 음식들이 열을 이루고 있었지만 무엇 하나 특별히 훌륭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슷비슷한 음식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미란이 와서 먹은 거라곤 샐러드 한 접시, ㅡ그것도 드레싱을 빼고ㅡ 연어 서너 점, 스파게티 한 젓가락, 과일 약간, 케이크 이 분의 일 조각, 커피 한 잔밖에 없었다. 문득 피로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미란이 아니던가. 미란은 내 심중을 모르고 연신 웃어보였다.

오빠.

라고 부르는 미란을 보며 새삼 그녀가 오늘 하루 종일 내게 오빠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항상 호칭을 생략하거나 화가 나면 격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오빠라고 부르게 하기 위해 가방 하나면 충분했나. 이제야 다시 미란의 얼굴을 살핀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은 그녀의 얼굴에 대학시절에 앳된 얼굴이 비춘다. 알고 보면 그녀도 사회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화장을 할 때 더 비싼 것을 바르게 될 것이고 우리가 아는 스킨, 로션, 크림을 넘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수많은 종류의 화장품들을 얼굴에 찍어 바를 것이다. 그렇게 점점 두텁게 만들어 필사적으로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숨기면서 살게 되겠지. 아마도 일이년이 흐르면 절대 이 가격을 가진 가방에 자신을 내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일까. 쇠퇴하는 것일까. 어쨌든 이제 일어날 시간이었다. 집에 가자는 내게 미란은 알듯 모를 듯 웃어보였다. 아니 아는 웃음이었다.

미란과의 하룻밤은 육십만원이면 충분하나. 뭐 나는 그보다 더 저렴하게 내 몸을 내어주지 않았나.

그런 미란이 가엽고 가여워서 더욱 힘껏 안았다. 내 품 안에서 미란은 더욱 작아보였다. 그런 미란을 안고 있는 나조차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방 안에는 열기와 숨결이 번졌다. 하지만 공간은 팽창했고 결코 우리는 그 공간 안을 채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결코 우리가 대학시절에 나누었던 호기심에 기반을 둔 사랑과 비슷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가였기에 결코 순수할 수 없었고 욕망이었고 분출이었다. 아프다고 신음하는 미란을 보고도 내 안에 수치심에 불구하고도 멈출 수 없었다. 밤은 길었고 아직 대가는 충분치 못했다.



결국 다시 오고 말았다. 미란과의 하루를 보내고 난 후 며칠 안 가 돈은 떨어졌다. 이력서는 한통도 쓰지 못했다. 정확히 안 썼다고 말하는 게 맞다. 연락 오는 곳도 없었다. 미란을 포함해서. 그날 새벽 난 여러 번 미란을 안았다. 미란은 겁을 먹고 있었지만 날 자극하지 않았고 지쳐 잠들어 있는 나를 뒤로 하고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미란이 남아있었다면 자괴감은 제곱이 되었을 지도 몰랐다. 그 후 집으로 돌아간 나는 흥행했던 지나간 영화를 두 편 다운 받아봤고 자장면을 시켜먹었고 텔레비전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의미 없이 웃었다. 저녁엔 맥주를 마시고 잤다. 그런 식에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상하리만치 조급하지 않았다. 가끔 이래도 정말 될까 생각됐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흰가운이 있는 건물 앞에 서있었다. 건물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여러 사람이 건물을 들어가고 나왔다.

오랜만에 본 흰 가운은 내 차트를 펼쳤고 용의주도한 미소를 보냈다.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실험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네.

흰 가운은 여러 가지 안부를 물어봤고 나는 네라고 답했다. 실험실 안에 사육 상자엔 새로운 쥐가 쳇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통통.

오늘은 어디를 감아드릴까요?

질문해도 됩니까?

흰 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닿으면 더 이상 붕대를 감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럼 약을 바르자마자 물에 닿으면 어떻게 되지요?

흰 가운은 잠시 얼굴에 표정을 감추었다. 그러다가 지나치게 내가 의심하지 않을 정도에 입을 뗐다.

바로 실험완료이지요. 하지만 고통이 심해서 추천드릴 방법은 아닌데 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접으세요.

그러면서도 흰 가운은 슬며시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엔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한다. 내겐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눈을 감았다. 우둘투둘한 타일의 느낌이 다리를 통해 전해져 왔다. 그리고 조심히 누웠다. 목에서부터 시작된 붕대는 허리까지 감겨 있었다. 다리만큼 바닥에 감각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차가운 느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천장에는 덮개가 벗겨진 형광등이 비스듬히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시야에 주황빛이 퍼졌다. 따뜻한 느낌이었다. 언제 느꼈는지도 아득했던 느낌이었다. 몸은 단단하게 압박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안전띠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화장실 안은 습했다. 하수구에는 말라붙은 터럭들이 있었다. 타일에는 곰팡이가 펴있었지만 며칠 전 누웠던 미란과의 침대보다 훨씬 편했다. 오랫동안 누릴 수 없었던 평온이었다. 아마도 깊이 잘 수 있을 것이고 눈을 떠도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을 것이다.

정말 간단한 실험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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