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활한 수악 곶자왈에 위치한 수악주둔소 주변 풍경. 주둔소는 숲 중앙에 숨어있다. 작은 사진 안 수악주둔소의 외벽으로 총구가 보인다.
수악 주둔소로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남원읍 신례리 북쪽 수악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초지와 계곡, 잡목숲을 헤쳐 들아가면 고대 유적처럼 시커먼 석성이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다. 1950년 겨울 경찰이 지휘하에 신례리, 하예리, 상효리 전 주민이 동원되어 피눈물로 주둔소 성을 쌓았다.
이 주둔소는 이때까지 한라산에 남아 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되었다. 당시 토벌대의 주둔지 석성 중에는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4·3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6월 25일 이후에도 제주는 4·3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1948년 11월 17일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시체가 가득한 '죽음의 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대규모 집단학살과 마을 방화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29일, 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2연대의 강경 진압작전은 이전의 상황보다 더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어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하여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당시의 석성은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는 중산간 지역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100전투경찰사령부
한국전쟁 직후까지 제주도 토벌을 주도했던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가 1950년 9월 6일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제주를 떠나자 한라산에 남아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은 제주경찰이 주도하게 된다. 1951년 창설된 제100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이원용 총경)는 필승중대, 한라중대, 백록중대, 신선중대, 뇌격중대, 충성중대로 편성하여 마지막 잔여 무장대의 토벌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 토벌작전의 개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무장대를 몰아놓고 이 지역에서 포착·섬멸하는 작전이었으며 최소한의 경찰병력을 이용하되 다수의 주민을 동원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보다 앞서 1951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해병1개중대(중대장 권석기 중위)가 제주경찰과 합동으로 전방에 투입되어 토벌에 나서게 된다.
수악주둔소는 바로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당시 80여명의 잔여 무장대는 기후가 온화하면서도 지형이 험한 한라산 남동쪽과 서귀포 북방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벌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요하게 축성되었다.
토벌부대 3소대는 수악주둔소 부근에서 무장대 40여명과 치열한 교전을 치른 끝에 5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수악주둔소의 위치는 수악의 동남쪽이며 신례천과 하례천의 계곡 사이에 있는 동산에 위치해 있어서 주변을 조망하기에 아주 적지다. 남으로는 신례리와 하례리, 효돈 넘어 까지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한남리 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수악의 주변과 북쪽으로는 물오름 인근까지 내다볼 수 있다.
주둔소는 내성과 외성으로 견고히 쌓았으며 외성은 보초와 전투의 편의를 위해 회곽도를 갖추고 있다. 회곽도의 바깥쪽 높이는 3.5m 가량이 되며 내벽은 2m 가량 높이다. 주둔소의 내부 면적은 대략 8백26㎡ 정도다.
수악주둔소의 축조 작업에는 인근의 신례리와 하례리는 물론 서귀포의 상효동 사람들까지 동원되었다. 주둔소가 구축된 이후 경찰토벌대는 주민들을 특공대로 조직하여 이 주둔소에 집결시킨 후 함께 토벌작전을 수행 하였다.
#주민동원, 주둔소 구축
주둔소까지 물자를 나르는 지원사업은 대부분 가까운 신례리 주민들이 맡아서 했다. 수용소 대장이 지원명령을 내리면 음식에서 술 까지도 바쳐야 했다. 신례리 주민들은 이 당시의 힘든 고통을 회상하며 고개를 흔든다.
주둔소의 정문 앞쪽에는 높이 6m 정도의 삼나무을 세워 꼭대기에 주둔소 표시인 하얀 깃발을 달았다. 그들은 토벌과정에서 사로잡은 무장대의 머리를 잘라 나무 꼭대기에 걸었다가 며칠 후에 그 머리를 나무 밑에 묻었다고 한 증언자는 그때의 상황을 실감나게 들려준다.
수악 주둔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없었던 까닭으로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외성과 내성은 물론이고 외성의 회곽도 등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주둔소 내부에는 건물이 있었던 곳과 건물에 난방을 했던 아궁이의 모습 등이 남아 있다. 화장실 터도 확인할 수 있으며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오는 올렛목과 내성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길목의 흔적들도 밑돌로나마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유적지로 보존 필요
성 외부는 동사면으로 일부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서사면과 남북사면은 원형에 가깝게 잘 남아 있다. 내성 서쪽면과 외성 사이에는 돌웅덩이 형태로 노천 목욕탕 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내성 내부에는 경찰전투100사령부 대장 숙소와 부대원들이 기거했던 숙소 등 3개의 건물터가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제주경찰국 제100경찰전투사령부에 근무했던 허모씨는 "1952년 창설된 100사령부는 4개 중대(101부대, 102부대, 103부대, 105부대)로 구성, 한라산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토벌작전을 실시했다. 1953년 1월에는 육군본부 직할부대인 무지개 부대와 합동작전을 실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초대 사령관은 김원용 총경이었다가 나중에는 한재길 경감이 맡았다"며 이 시기에 많은 주둔소가 축성되었다고 말했다.
수악주둔소는 4·3의 말기인 1951년부터 해병중대, 제100전투경찰사령부, 무지개부대의 산남 일대 토벌의 핵심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례리 주민 등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나는 노역과 각종 지원, 그리고 토벌작전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통한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현장에서 만난 사람 / 양성춘씨]"음식·고기·술까지 갖다 바쳤습니다"
양성춘 할아버지(79·사진)는 4·3당시 신례1리 본동과 좀 떨어진 만지동에 살고 있었다.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의 소개명령에 따라 지붕을 전부 뜯어내고 공천포로 가던 중 항애골에서 많은 주민들이 학련과 토벌대에 의해 죽게 되는데, 자신도 누군가의 손가락질에 의해서 잡혀가 죽도록 토벌대에게 매를 맞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마을이 재건되고 50년 9월 육군에 입대하였는데 그게 용케 그 어려운 시절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군인에서 제대하여 고향에 와보니 수악주둔소가 축성되어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군대에 가버리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을이 총동원되어 주둔소를 쌓았다고 했습니다. 이후에 나도 주둔소에 나가 토벌을 갔었는데 수악교 위쪽 하짜마끼도로 까지 간 적이 있어요. 주둔소에 필요한 물자들은 신예리 마을에서 공급했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불이며 식량, 고기 등을 갖다 바쳐야 했고, 구장을 지냈던 동네 어른은 술을 안가져 왔다고 주둔소 경찰들에게 매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말을 안들으면 곧 죽음이니까요."
그는 말한다. 4·3의 엄청난 희생은 당시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누가 산에 가고 싶었겠느냐. 토벌대들이 죽이고 몰아가니까 도망간거지."
그의 숙부는 김천형무소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