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124)한림읍 강구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124)한림읍 강구리
그 어느 마을보다 정이 두텁다는 자부심 가득
  • 입력 : 2026. 10.30(금) 02:00
  • 양기훈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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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19세 유도영웅 이현지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78㎏ 이상급 결승에서 상대방을 한판으로 꺾고 챔피언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선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씨름선수로 명성을 날리던 이치훈 제주도씨름협회 전무이사. 2007년생 이현지에게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주고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힘과 체력, 지적 역량까지 다듬고 키워낸 분. 이현지는 남녕고 1학년 때부터 2023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다음 해 바로 세계청소년유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한국유도계의 신데렐라로 등극했다. 괴력에 가까운 파워와 함께 유럽 선수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은 체격과 정신력은 끊임없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에서 나타나는 것. 이현지 선수의 할아버지 이성종(83세)님과 할머니 강청자(81세)님이 살고 있는 강구리를 찾게 된 것은, 세계를 제패하는 누구라도 그 뿌리는 하나의 마을이라는 사실. 필자가 강구리를 찾았을 때, 경로당에 모인 할머니들마저 대화 내용은 마을 잔치를 언제, 어떤 형식으로 성대하게 할 거냐는 논의였다. 참으로 감동적인 정겨움이 넘쳐나는 분위기다.

홍성오 이장

이 마을 명칭의 유래는 '강구못'이라고 하는 옛 지명에서 왔다. 원래는 한림리에 속해있었는데 속칭 진동산 가마귀빌레와 강구못 일대를 강구동이라고 했다. 현재 116세대 200여 명 주민들이 오순도순 모여사는 소박한 농촌마을이다. 1948년 제주4·3으로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되는 고난과 아픔을 겪었던 역사가 있다. 1950년부터 주민들이 다시 모여들어 마을을 재건하고 1964년에 한림2리에서 분리돼 행정리가 된 것이다.

마을 안길을 다니면서 느껴지는 가장 큰 인상은 정갈함이다. 깨끗함이 일상화된 사람들이 그 어떤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예의가 불문율처럼 흐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자기 집 울타리 밖 도로까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자신의 마당처럼 생각하고 청소하는 마음가짐이 아니고서는 구축할 수 없는 풍경이다. 이런 것에서 찾는 주민들의 묘한 일체감. 거창한 구호가 난무하는 시대에 농촌마을이 묵묵하게 이뤄내는 일상성은 삶의 터전 자체가 하나의 가치관을 지닌 철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니 2008년에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이 됐음은 당연한 결과다. 이러한 정감 어린 마을 분위기에 매료되어 20·30 세대들의 입주가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한다. 마을에 대한 인식과 소문이라고 하는 것은 냉정한 평가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단순히 경제적 판단에 의해서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이웃해 살고 싶다는 욕구도 엄연하게 작용하는 것. 소박한 농촌마을 강구리의 정감 어린 영향력은 이주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내실이 단단하고 기운이 좋은 마을이기에 한림읍 지역에서 열리는 체육대회가 있으면 씨름과 줄다리기 등에서 자주 우승하는 단결력과 체력을 과시한다. 축산과 감귤, 특용작물인 블루베리, 푸룬 등으로 농업소득을 올리고 있는 작지만 강한 농촌이다.

홍성오 이장에게 강구리의 가장 큰 자부심을 묻자 간명하게 대답했다. "두터운 정". 사람들이 너무 좋으니 이웃해 살아가는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척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을. 그릇이 크고 화통한 성격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지니고 있으니 이러한 마을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당면한 마을의 과제로는 지난날 마을회관으로 쓰던 건물을 활용해 마을주민들의 농외소득이나 어르신들이 용돈을 벌 수 있는 사업공간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행정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옛날에는 70대를 보고 할머니라고 했지만, 지금은 '아주머니' 호칭을 사용해야 하는 건강함을 보여주고 있는 시대다. 일을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고 건강을 유지해 온 우리네 정신문화에 입각하여 생각하더라도 일거리창출 이상의 복지정책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행정지원을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시각예술가>



비 내리는 농로에서
<수채화 79㎝×35㎝>

강구리(江龜里)라서 강(江)을 그려야 하겠는데 강은 없고 난감하던 차였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마을회관 3층에서 내려다본 농로가 빗물에 흠뻑 젖어 있는 모습이 흡사 강물이 흐르는 느낌이라 바로 화폭을 펼쳤다. 강물이 흐르는 길이나 농부가 밭일을 하러 다니는 길이나 어디론가 흐르는 것은 같다는 생각에 흐뭇한 마음으로 그린 것이다. 눈부신 태양광선이 보유한 메시지도 강하지만 농로에 반사된 이색적인 공간감 또한 길가 옆 농작물의 여유로움과 대비돼 농촌마을의 깊은 정감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집과 밭을 이어주는 저 길이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마을의 역사라는 생각이 그림을 그려내는 시간 내내 들었다.

연필소묘 위에 담채를 통해 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을 묘사력 측면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길과 그 옆에 나무며 풀들이 밭에 있는 농작물과 함께 동시에 비를 맞고 있다. '차별'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일체감이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밝은 색깔 위에 수막이 형성되니 햇살이 명암법을 보장해주지 않더라도 반사된 은은함으로 어딘지 모를 실질적 현실을 증명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떤 농부가 길을 걸어가 줬으면 그림의 완성도를 완벽하게 획득할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그러한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했으니 미완의 농로라는 부제를 달고 싶었다. 조용한 농촌마을의 서정성을 가을비 내리는 농로를 통해 표현한 것.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 다시 와서 그리면 어떤 느낌일까? 이 또한 아름다운 비교가 될 것이다.



팽나무와 밭담이 만나
<수채화 79㎝×35㎝>

밭담은 단순한 공간의 경계가 아니다. 하루하루 노동의 역사를 쌓은 불멸의 명저다. 어떤 지식인도 저 틈바구니가 써 내려간 땀방울의 활자를 해독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그늘을 드리워준 팽나무는 세월을 알기에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린 것이다. 밭과 집이 이웃해 있는 풍경을 눈부신 태양광선 아래 펼쳐놓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행복감이다. 팽나무 잎사귀를 하나하나 수를 놓듯이 그려나갔다. 밭담이 돌 한 덩이 한 덩이 쌓여서 분위기 이상의 것들이 이뤄지는 것처럼, 잎사귀 하나하나 그와 같은 정성이 있어야 팽나무와 밭담이 상통하는 벗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 이러한 공간을 그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저 멀리 원경에 그려진 다세대주택과 같은 건물들 때문이다. 한림읍이 도농복합지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팽창하는 시대적 상황이 느껴지기에 가까운 곳과 멀리 있는 것이 어떠한 동시대적 시간성에서 묘한 여운을 던져주고 있기에 그린 것이다. 가을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날, 이 마을의 평화로움을 전달하는 메신저로 저 팽나무와 밭담이 벗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선택한 것은 이웃의 의미를 그리고 싶은 욕심에서다. 상보적인 관계다. 형질은 너무도 다를지언정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조화로움을 창출하는 에너지. '다름'을 차별이나 배척의 기준으로 쓰지 않고 하나 되도록 조화를 만드는 세상, 이런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마을.

<제작 지원=제주특별자치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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