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70] 3부 오름-(129) 백약이오름과 문석이오름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70] 3부 오름-(129) 백약이오름과 문석이오름
글자 뜻에 매달린 지명해독, 백 가지 약초가 나는 오름
  • 입력 : 2026. 04.21(화) 03:00
  • 김찬수 hl@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백약이’, ‘개여기’ 한 오름에 두 이름


[한라일보] 백 가지 약초가 난다는 오름이 있다. 이 오름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와 구좌읍 송당리 경계에 있다. 표고 356.9m, 자체높이 132m다. 가운데 원형의 크고 깊은 분화구가 있다. 이 오름은 주위 여러 오름 중에서도 우뚝해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압권이라 할만하다. 북사면은 얕지만 우묵하게 골이 나 있는데 이 골짜기는 서쪽으로 돌아 개오름 동쪽을 통과해 천미천에 합류하는 지류의 원류가 된다.

백약이오름. 주위 오름에 비해 높고 웅장하다. 동거문오름에서 촬영. 사진 김찬수

이 오름의 지명은 예로부터 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해 백약이오름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이야기는 김종철의 '오름 나그네'라는 책에 온갖 약초가 나는 오름이라는 데서 이런 지명이 붙었다는 설명을 인용 표기 없이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이 오름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09년 탐라지도에 개역악(開域岳), 18세기 중반 제주삼읍도총지도에 개역악(開亦岳) 등으로 표기됐다. 그러던 것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탐라지초본에 백약산(百藥山)으로 표기되더니 다시 19세기의 탐라도총지도에 개역악(開域岳)으로 나온다. 이게 끝이 아니다. 1872년 제주삼읍전도와 제주군지도, 19세기 제주삼읍전도, 일제강점기 지도와 1954년 증보 탐라지 등 쟁쟁한 문헌에서 백약악(百藥岳), 백악(百岳) 등으로 표기됐다. 이처럼 고전에 나오는 지명들은 개역악(開亦岳), 개역악(開域岳), 백악(百岳), 백약봉(百藥峯), 백약산(百藥山), 백약악(百藥岳), 백약이오름(百藥伊岳) 등 7개가 된다.

봉과 악 등 후부 지명어를 제외하면 개역악(開亦岳), 개역악(開域岳), 백악(百岳), 백약악(百藥岳) 등 4개라 할 수 있다. 이 이름들은 다시 '개역'과 '백악'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 저자는 이 두 가지 표기 중 개역악(開亦岳), 개역악(開域岳) 등은 '개여기오름'의 한자 차용표기이며, 이 '개역이' 혹은 '개여기'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불룩한 오름과 골짜기가 있는 오름


사실 육지 사람이 제주도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이런 발음을 접하게 되면 아주 이질적으로 들릴 것이다. 이걸 한자로 표기하려니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음운법칙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는 데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하기가 만만치 않다. '개역이' 혹은 '개여기' 같은 말이 어떻게 태어난 것인가.

이 오름의 지형적 특징과 주변의 오름 지명들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종합해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 오름에는 골짜기가 있다.

오른쪽 분화구가 둥글고 평평한 오름이 문석이오름. 왼쪽 멀리 보이는 오름은 백약이오름이다. 사진 김찬수

오름 서쪽에서 천미천의 한 지류가 발원한다. 또한 동쪽에는 수산곶자왈이 펼쳐지는데 인근의 오름 지형들과 대비되면서 깊은 골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골'이라는 지명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오름이니 '오름'이라는 지명어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오름의 고형은 '올'이니 '골올'일 것이고, 이런 언어생활에서 '골올이'로 재구할 수 있게 된다. 이 발음은 개오름에서 보는 것처럼 '골'은 'ㄹ'이 탈락하고 오름의 고어형인 '올'에서도 'ㄹ'이 탈락하면 '가아이'가 된다. 이 발음은 실생활에서 다시 음운변화를 일으켜 '가여기', 이것이 종국에는 '개여기'로 발음된다.

이런 음운변화는 표준어 음운 규칙에는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방언에서 나타나는 '전설모음화(모음동화)' 현상으로 제주 방언·서남 방언 등에서는 뒤 음절의 전설모음(ㅣ 계열)이 앞 음절의 모음을 끌어당겨 오→여 / 요→여처럼 변하는 현상이 있다. 넓은 의미의 모음동화로 분류된다. 따라서 '개여기'라는 지명은 '갈올'에서 출발해 '골올이', '가아이', '가여기', '개여기'의 변화를 거친 말이다. 이 '개여기'를 '개역'이라고 인식해 표기한 것이 개역악(開亦岳), 개역악(開域岳)이다. 뜻으로 보면 골짜기가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개오름과 같은 말이다.



문석이오름은 위가 평평해


백악(百岳), 백약악(百藥岳)과 같은 '백악' 계열의 지명은 이 오름이 불룩 솟아오른 지형 특성을 반영한 지명이다. 즉 붉은오름, 밝은오름이라는 지명을 갖는 오름이 많다. 이 오름의 원래 이름은 '불은 오름'이라는 뜻이다. 불룩 솟은 오름이라는 뜻이다. '백악'이란 '불은오름'이라고 하던 것을 '붉은오름'으로 인식하여 '흙이 붉어서'라고 설명해 온 여러 오름 지명과 같다. 이런 인식하에 '밝오름'으로, 이것이 'ㄹ'이 탈락하면서 '박오름', 여기에서 '뵉오름(바+l+ㄱ)'으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백악(百岳)으로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악'이란 발음이 '백약이'로 발음되게 되는데, 이런 음운현상은 국어의 대표적인 모음동화(전설모음화) 현상의 하나다. 뒤 음절의 전설모음 /i/가 앞 음절의 /a/에 영향을 줘 '악이→약이'처럼 앞 모음이 전설화되는 현상이다. 이런 과정을 몰랐던 기록자들이 '백약이'로 인식해 '백약악(百藥岳)', '백약이오름(百藥伊岳)' 등으로 기록한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불룩 솟은 오름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인접한 문석이오름은 이의 대비지명이다. 이 오름은 표고 291.8m지만 자체높이는 67m에 불과하다. 백약이오름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위가 평평한 지형이다. 이 오름을 두고 문어를 닮았다고들 하지만, 이 지명의 '문'은 '마라'의 축약형 '마'에 관형격 접사 'ㄴ'이 결합한 발음이다. '석이'는 수리의 축약형 '쉬'의 변음이다. 오름의 후부 지명어로 많이 나타난다. 주변에는 다랑쉬오름이 있다. 위가 평평한 오름이라는 뜻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453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