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리(里) 단위 마을로 인구가 4000명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단순하게 대촌이라는 의미를 넘어 거대한 부가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귀포시 성산읍의 읍소재지라는 특성을 고려해 보더라도 지역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도·농 복합지역으로 전환돼 있으며 대도로에서 느껴지는 모습은 여느 도시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력한 주민자치 역량으로 정평이 나있는 마을이다. 상투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마을사업들이 결국은 본질적인 마을공동체 회복을 위한 마인드다. 역점사업으로 삼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주민경제활동에 대한 마을역량 강화'다. 이미 도시화의 길에 들어선 마을공동체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경제의 주체로 나서기 위한 굳은 의지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마을공동체 네트워크가 소득창출에 힘이 되고 가구별 행복지수의 견인차가 돼야 한다는 각오이며, 참여의식이다. 이러한 현실적 요구를 수용하는 행정적 실천이 도시재생사업으로 요약된다. 지역주민의 의견이 바탕이 되고 이를 반영하는 조직적 시스템을 도시재생주민협의체 형태로 만들어서 마을발전 모델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중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사업으로 파악되는 것이 '워케이션센터' 구축이다. 자동차로 10분 거리 내에 수두룩하게 펼쳐진 관광자원들은 이 시대의 휴양문화와 결합해 여유로운 시간을 제공하는 천혜의 요소다. 일과 휴가를 공유하는 장소를 제공하는 사업이 주는 지역경제 시너지 효과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목표다.

오문선 이장
참으로 유서 깊은 역사적인 마을이다. 옛날 고성리는 가마, 남작, 남청리라고 불럈다. 고려시대 때 현감 벼슬을 가진 자가 주위에 성을 쌓고 지역을 다스리는 중심 거점으로 삼았다. 왕조가 바뀌고, 조선 태종2년 정간이라고 하는 목사가 '옛 성터가 있다'는 뜻으로 '고성(古城)'이라고 명칭해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유추한다면 이 지역에 촌락이 형성된 것은 1200년 경 고려 때로 파악된다. 조선조 제주목사 이원진이 쓴 탐라지에 이 마을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수록돼 있다.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패한 후, 고려 충렬왕 3년(1277년) 원나라의 조정에서 목마장으로 탐라섬을 활용하려 했다. 당시 고성리와 수산평 일대가 중요한 목장이었다는 것이다. 1416년 태종16년 제주도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나눠서 다스리게 된다. 정의현의 관아가 이곳 고성리에 소재하게 되면서 읍성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현감 이이가 고성이 현청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고 상소해 현청 소재지를 지금의 성읍으로 옮기게 된다. 1915년 도제가 실시되면서 정의면 고성리가 됐다. 1933년 고성리 1구, 2구로 나뉘었다가 1951년 4월에 1구는 현재의 고성리로 2구는 신양리로 분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문선 이장에게 고성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출향 인사들의 애향심"이라고 대답했다. 마을 발전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가진 것을 모아서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부지를 마련하게 해주는 등 그 고마움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마을의 위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대가 흘러감에 따라 고향과 거리감을 지닌 안타까운 모습들도 보이는 형국이지만, 그래도 고성리의 결속력은 선배들의 애향심을 거울삼아 마을공동체 발전에 힘을 모으는 정신적 뿌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가장 감동적으로 느낀 모습은 충혼묘지였다. 성산중학교 바로 옆 성산읍 충혼묘지에 191분이 모셔져 있다는 것. 1964년 조성된 이 충혼묘지에는 6·25 때 참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이 있다. 운동장 옆에서 항상 중학생 손자들을 바라보고 있을 참전용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러한 구조를 생각해 실천에 옮긴 고성리의 마음.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가?" 묻고 또 물어도 그냥 겸손한 미소만 짓고 대답하는 분이 없다. <시각예술가>
봄 햇살 맞이하는 밭<수채화 79cm×35cm>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대로변에서 느낄 수 없는 고성리의 농촌스러운 풍경이 가득하다. 소수산봉 동쪽 지경에서 만난 상징적인 조합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워서 그렸다. 맨 위 집들과 가장 아래 연두색으로 빛나는 밭. 그 사이에 비닐하우스며 나무와 돌담들이 정겨운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따로 있어 보이지만 화폭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면 한 가족이 된다. 집이라고 하는 인간의 생활공간과 그 저변에서 생존이 가능하도록 대지의 여신처럼 자리 잡은 밭이 마치 분수의 분자와 분모를 닮았다. 가장 중요한 회화적인 사실은 지붕 위의 공간이 상식적으로 하늘이 아니라 눈부신 광선 뒤에 있는 소수산봉 아랫부분이다. 짙은 초록이 눈부신 대기와 융합해 저 정도의 밝기로 나타난 것이다.
봄이 솟아나고 있지만 나무들은 어딘가 모를 겨울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른 잎사귀들이 보유한 야릇한 갈색들이 분포된 형국이다. 그래도 저 밭에서 솟아나는 연두색 시간성을 이기지 못한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은 물리의 영역이 아니라 이 밭에서 확인되는 자연현상일 뿐이다. 다시 때가 되면 변함없이 솟아난 희망의 에너지를 그린다. 고성리 사람들의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여기. 농로가 아름다운 마을이다. 속과 안을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손해가 막심인 마을이다. 옛 정취가 깊이 묻어나는 그런 곳. 똑같은 장소에서 김을 매는 모습을 다시 그리러 와야겠다. 오후의 햇살과 너무 어울리는 삶과 자연이 아름답게 여기 있다.
고성리의 햇살과 일출봉<수채화 79cm×35cm>
해는 소유권이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뀐다. 아침나절엔 성산리에 있던 해가 고성리로 넘어오면 일출봉의 느낌은 그 어떤 인상주의 화가도 그리기 어려운 눈부신 공간감으로 변화한다. 하늘색과 명도가 대등할 정도로 태양광선 속에서 신비한 자태를 보이게 되는 것. 지금은 소수산봉 뒤편에 태양이 있다. 연극무대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고성리에 설치돼 일출봉을 비추는 상황. 마을이 형성된 이후에 선조들은 해가 뜨는 날이면 이 야릇한 환상을 감상했으리라. 그 시각적 풍요 속에서 농경과 어로, 축산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모습. 대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짙은 초록을 가진 사철나무를 찾아다니다가 만난 동백나무들. 나이가 20살은 넘은 것 같은 싱그러움. 근경이 짙을수록 원경의 희미함은 더 멀리 느껴지는 회화적 시각 상대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다. 뽀얀 대기의 숨결 뒤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일출봉의 재발견이다. 탐닉의 대상 공간, 그 시각적 위치가 주는 행복감이 여기 있다.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지질자원으로서의 타이틀 못지않게, 태양광선이라고 하는 시간적 변화성과 대응해 어떤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시켜 주는 고성리의 관점을 그린 것이다. 일반적인 사진의 개념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근경으로 해 시적 상상력까지 침범하는 일출봉의 매력을, 고성리의 시각적 위치는 하나의 관점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 세계적인 분화구가 보유한 새로운 마력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는다.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